묻힐 땅도 없던 그들, 묘비는 삶의 기록이었다
[한인 이민 선조의 비명<碑銘>을 찾아서]
〈1〉하와이 묘지에 서린 역사
20불도 안 되는 월급 모아
독립운동 자금 지원하고
학교 세우고 유학도 보내
올해 "고맙습니다" 기념비
묘비에 새겨진 기록은 한인 초기 이민 역사를 응축하고 있다.
14일 오전 11시, 그 실마리를 잡기 위해 오아후섬 하와이주 의사당 앞으로 향했다. 와이키키에서 서쪽으로 약 3마일 떨어진 이곳은 호놀룰루의 중심이다. 의사당 왼편에는 한국전 전사자 기념비가 있다.
주의사당 직원 샘 바니는 “한국전에 참전한 하와이 출신 군인 중 407명의 전사자가 여기 검은색 대리석에 각각 새겨져 있다”며 “이중 한인 성씨는 10여 명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대리석 중 이름 하나를 가리켰다.
‘CHAN J P KIM JR’ (찬재 박 김 주니어)
미육군성에 따르면 34보병 연대 소속의 찬재 박 김 주니어는 당시 21세 나이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실종(1950년 7월8일)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주 한인 중 첫 포로다.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은 “호놀룰루 태생의 찬재 주니어는 하와이 첫 이민선에 탔던 ‘김찬재’ 씨의 셋째 아들”이라며 “아버지의 모국인 한국에 가볼 수 있다는 어머니의 권유로 일본 주둔 미군에 지원했다가 한국전에 차출됐다”고 말했다.
인근 오아후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재 주니어의 아버지 김찬재(1963년 사망)씨와 어머니 사라 박(1997년 사망)씨를 비롯한 900여 명의 한인 이민자가 안장돼있다.
호놀룰루총영사관 이서영 총영사는 “올해 9월 총영사관과 국가보훈부는 오아후 묘역에 한글로 ‘고맙습니다’를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며 “누아누메모리얼파크, 다이아몬드메모리얼파크, 하와이안메모리얼파크 묘역에도 한인 초기 이민자가 다수 안장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주의사당 건너편 정부 건물 앞에는 표석 동판이 하나 있다. 한인기숙학교(1906년 개교)의 터였음을 알린다.
민주평통 하와이협의회 박봉룡 회장은 “당시 한인들이 무려 2000달러를 모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한인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세워 달라고 요청해 만들어진 학교”라며 “한인 노동자들은 각 농장에서 젊은 인재를 뽑은 뒤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한인기숙학교로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미래를 내다봤었다”고 말했다.
이 교회 한의준 담임 목사(22대)는 “첫 이민단이 도착한 후 을사늑약으로 이민이 금지된 1905년까지 7415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왔다”며 “처음 도착했던 이민단은 대부분 오아후 북쪽 와이알루아 지역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흔적을 찾기 위해 교회에서 북쪽으로 30여 마일 거리의 와이알루아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사탕수수밭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차창 너머로 파인애플밭과 커피나무 밭이 100여 년 전 풍경을 대신한다.
묘지는 고요하다. 산들바람만이 적막을 깬다. 한인 이름이 적힌 묘비들을 하나씩 살폈다. 그들의 노고에 비해 묘비의 자태는 쓸쓸하다. 풍화작용으로 부서진 비석이 눈에 띈다. 일부는 글귀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찾는 이가 없어 방치된 지 오래된 게 분명하다.
이덕희 소장은 “당시 한인들은 죽어도 묻힐 땅이 없다 보니 농장주가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 한편에 묻기도 했다”며 “당시 한국으로 돌아간 이들을 제외하고 이후 사진 신부 등으로 온 사례를 합하면 결국 4500명 정도가 오늘날 한인 이민사의 시작점이 된 것”이라고 전했다.
홀씨와 같았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이는 이제 별로 없다. 마지막 기록인 묘비만 외롭게 서 있다.
호놀룰루=장열 기자ㆍ사진 김상진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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