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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국익만 존재"…'외교 황제' 헨리 키신저가 남긴 100살 지혜

" “미국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
지난 2019년 뉴경제포럼에 참석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외교의 황제’ ‘탈냉전의 설계자’로 불린 외교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코네티컷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00세.

국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단순한 국제정치학자이자 외교관을 넘어 “20세기 후반 국제정치의 질서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냉전 시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고 1972년 역사적인 미·중 수교를 이뤄낸 마중물이 키신저가 주도한 ‘핑퐁외교’와 그의 극비 베이징(北京) 방문이었다. 미국을 베트남전 장기화라는 수렁에서 건져낸 사실상의 주역도 1973년 파리협정의 산파 역할을 한 키신저였다.

독일 바이에른 출신으로 해외에서 태어난 최초의 미국 국무장관이자 최고령 전직 장관이었던 그는 이후에도 현대 외교사에서 굵직굵직한 목소리를 내 왔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미‧중 사이의 패권 다툼이 고조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1971년 중국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저우언라이(왼쪽) 당시 중국 총리가 헨리 키신저에게 젓가락으로 요리를 덜어주고 있다. 사진 민음사 제공
키신저는 백악관이 대외정책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닉슨 행정부에서 1969년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았고, 이후 1973년 국무장관까지 겸임하면서 미국 외교 정책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그는 냉전 시대 외교 정책으로 ‘힘의 균형’을 주장했다. 이를 토대로 중국·소련·베트남 등 공산주의 진영을 상대로 ‘데탕트(긴장 완화)’를 추구했다. 소련과는 핵 군축의 기초가 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과 미사일방어(MD)를 제한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제한조약(ABM Treaty)을 이끌었다. “한 나라가 절대 안보를 추구하는 것은 다른 모든 나라의 절대 불안을 의미한다”면서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회 위원 겸 외교부 부장이 2022년 9월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AP=뉴시스
특히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물밑외교를 통해 굵직한 역사적 분수령을 만들어냈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중국 측과 접촉한 뒤 그해 4월 미국 탁구 대표팀의 중국 방문 경기를 성사시켰다. 같은 해 7월엔 007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기자들의 눈을 피해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공산당 총리를 만났다. 양국 모두 체면이 중요한 시기에 새벽 2시까지 밀고 당기는 논의 끝에 이듬해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주석의 역사적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베트남전 종결에서도 지연전술을 펼치는 북베트남과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기 싫은 닉슨 대통령, 국내 반전 여론의 틈바구니에서 키신저는 미국의 출구전략을 마련했다. 1973년 파리협정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킨 공로로 북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득토(黎德壽)와 함께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만 레득토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1970년대 초반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셔틀외교’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도 키신저다. 그는 1973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양측을 오가며 중재에 나섰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는 포괄적인 평화협상이 아닌 아랍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미래에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중재했고, 이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고 전했다.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별장 상황실에서 베트남전 상황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사진 미 국립문서보관소
그는 1977년 국무장관을 끝으로 미 행정부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영향력은 여전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의 전략 부재를 지적하는 등 외교 현안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컨설팅 기업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해 다국적기업의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2015년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1375개 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 등 학자 1615명을 상대로 ‘지난 50년간 가장 효과적으로 일한 국무장관’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32.21%를 득표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선 “유럽 지도자들은 러시아와 더 장기적인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되며 러시아를 중국과 영구적인 동맹으로 몰아넣는 위험을 무릅써서도 안 된다”며 크림반도 회복을 포함한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늘도 있다. 키신저는 1970~1980년대 남미의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미국이 수행한 ‘콘도르 작전’의 배후로 알려졌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이 당선되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부추긴 일이 대표적이다. 1976년에는 아르헨티나의 이사벨 페론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도 한몫했다. 또 베트남전 당시 캄보디아의 비밀 폭격을 승인해 다수의 민간인 희생을 초래한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23년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키신저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19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한 그는 게슈타포(나치의 비밀경찰)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해 ‘동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종전 후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키신저는 1957년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소련의 도발 대응책으로 내놓은 대량보복정책이 미국의 운신 폭을 좁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신 전술핵과 재래식 전력을 상황에 맞게 운용하는 유연대응정책을 제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9월 5일 청와대를 예방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환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중앙DB
키신저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1973년 청와대를 예방한 키신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욤 키푸르 전쟁, 대북 도발 등을 논의했다. 이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에게 한반도 외교 현안에 조언을 건넸다. 키신저의 대표 저서로는 『외교』(Diplomacy·1994)가 꼽힌다. ‘빈 체제’부터 냉전까지 외교사를 총망라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체제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 『회복된 세계』도 평화체제와 세력균형에 관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키신저는 지난 7월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는 등 최근까지도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해 왔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키신저 박사를 비롯한 미국의 선견지명 있는 사람들이 중·미 관계를 정상 궤도로 회복하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계속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등 키신저를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다.

키신저 전 장관의 유족으로는 50년간 함께한 아내 낸시 매긴스 키신저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두 자녀 데이비드·엘리자베스, 그리고 손자 5명이 있다.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는 고인의 장례식이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추후 뉴욕에서 추모식이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영근(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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