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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의 얼굴

수직 수평의 선들이 지나간다 / 길게 둥글게 연결되어 한 선처럼 / 당신은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눈을 뜬다 // 흔들리는 풀같이 고단한 하루 / 앞으로 다가서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 평면의 그녀는 일어나 입체로 접어진다 / 빛의 방향으로 그림자가 길게 눕고 / 지우는 것도 그리는 것이어서 / 어둔 그림자 속에 빛의 존재가 어렴풋하다 / 양 면으로 팔을 뻗어 하늘을 들이 마시면 / 풍경은 저 멀리서 빠르게 눈 앞으로 다가온다 / 빠른 손 끝의 움직임에 호수는 멀고 가까워진다 // 호숫가 잘려나간 나무 밑둥에 앉는다 / 오른쪽 끝을 만지다 왼쪽 끝으로 / 머리를 매만지다 턱밑이 깊어진다 / 눈 가장자리를 바라보다 귀 매무새를 정리하고 / 눈동자, 코끝의 정점을 콕 찍는다 / 눈매가 살아나고 갸름한 양볼, 돌출 같은 웨이브 / 지울수록 섬세히 그려지는 호수의 얼굴 // 지우는 것도 그리는 것이어서 / 호수는 당신 얼굴로 깊어 간다
 
[신호철]

[신호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진다’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이어서 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허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 내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로 이 시는 끝나고 있습니다. 이 깊은 가을 떨어지는 것들을 두 손으로 받아 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 턱을 고이고 당신의 문 앞에서 당신의 문이 열리길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창조주의 눈 속에 담겨있는 깊은 가을의 의미, 떨어진다는 의미는 살아야 하는 마지막 결단이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모든 것을 떠나 보내지 않으면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없기에 보이는 것들을 떠나 보이지 않는 아래로 더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윗잎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을 때 봄이 되면 새잎이 그 위로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호수의 얼굴은 평온합니다. 잔잔한 물결위로 가을이 짙게 묻어납니다. 호숫가 잘려진 나무둥지에 앉아 있습니다. 호수의 표면에 겹쳐오는 한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습니다. 길다면 긴 생을 통해 한결같은 몸짓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무릎으로 하루를 마감하신 당신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손잡음이 벌써 9년째로 접어듭니다. 안녕 하신지요?
 
누군가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본향에서의 삶을 위하여 준비된 경기장 같다’란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분은 험난하고 치열하게, 어떤 이는 미래가 없다는 듯 자신의 욕망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길게 살아가고 어떤 분은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삶은 잔잔하고 고요했습니다. 불현듯 밀려오는 두려움과 절망을 따뜻한 손으로 받아 내며 속으로 속으로 울음을 삼켰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늘 평온했고 손은 늘 따뜻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 그곳에 도달할 순 없지만 눈을 감아도 뵈고 귀를 막아도 들려옵니다. 몇 날, 몇 밤이 지나고, 또 한 달, 한 해가 지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을 손잡을 수 있는 순간이 오겠죠.  
 
나에게는 편안하게 몸을 기댈 수 있는 나만의 쿼렌시아가 있습니다. 거리에 가로등이 줄지어 켜집니다. 저마다 저 가로등의 끝을 향해 분주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퀸튼 길을 따라 가다 팔레타인 길을 지나면 언덕길을 오르게 됩니다. 오른쪽으로 동산이 보이고 그 길로 접어들면 양쪽으로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노을이 하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때나, 눈송이가 펄펄 유희를 즐길 때, 언덕 위 나무가 오랜지 빛으로 변해가는 요즈음엔 자연히 발걸음이 옮겨집니다. 그곳에서 종종 밤을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네 주변에 있는 작은 호수. 수 백 번도 더 찿아간 호수의 얼굴은 항상 다른 얼굴을 띄고 있습니다. 호수의 얼굴은 내 마음의 얼굴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늘 반갑게 맞아줍니다.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레나데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시 한 편을 물결처럼 마음에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호수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과 겹쳐져 올 때면 내 속에서 나직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당신 이름을 부릅니다. “엄마~~”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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