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대책 없는 날의 길찿기
영감은 예술가나 철학자, 과학자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로 얻는 착상이나 번개같이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사용된다. 영감은 떠올랐다가 휘리릭 빨리 달아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던지 남겨놓아야 재생이 가능하다.
영감은 고요한 새벽이나 주변에 방해자가 없을 때 번득인다. 호수에 번지는 작은 파문이나, 혜성에서 떨어져 나와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별똥별의 아픔으로 다가온다.
소문난 늦잠꾸러기에서 새벽형 인간으로 변신해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선다. 새벽은 별빛과 달빛, 일출이 교차시키며 기묘한 색깔들을 수채화처럼 하늘바다에 푼다. 영혼의 바다에선 조각난 언어들이 날파리처럼 둥둥 떠다닌다. 재빨리 낚아채 메모해 두지 않으면 영영 기억에서 사라진다. 메모할 곳이 없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단어를 계속 외우는데 아차! 집 문을 열자마자 날파리처럼 날아가 버린다.
우리집은 곳곳에 스티커나 메모지가 즐비하다. 번개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착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펜과 종이는 영감의 생명줄이다. 한 단어, 한 줄이라도 적어두면 물레를 잣듯 생각의 실머리를 뽑아 한 필의 명주를 짤 수 있다.
나이 들면서 별의 별 일이 다 생긴다. 어느날 갑자기 눈 앞에 검정색 줄이 왔다 갔다 했다. 화들짝 놀라 안과에 갔다. ‘날파리증후군’으로 의학적 명칭은 비문증으로 진단이 났다.
원인은 노화로 인한 유리체의 액화현상 때문인데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지만 무시하고 생활하면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눈 앞에 어른거리는 날파리나 검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의사 말 믿고 신경을 끄니 정말이지 날파리처럼 오락가락하던 점이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는 것은 안 보고 살 수 있도록 두뇌를 재편성하면 사는 게 수월해질까.
글쓰기는 대책 없는 날의 길찿기다. 한 발자욱도 못 나가게 새벽 안개가 앞을 가로막을 때, 절망이 먹물처럼 화선지를 적실 때, 유년의 풍금소리가 건반 위에서 멈출 때, 끝이 날카로운 초생달이 가슴을 난도질 할 때,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망연자실 하루를 견디기 힘들 때, 자음과 모음은 날파리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추운 겨울밤 고슴도치 두 마리는 서로 기대며 체온으로 추위를 견딘다. 너무 가까이 대면 가시 때문에 상처를 입고 떨어지면 추워서 상처 주지 않는 따뜻한 거리를 찿아야 한다. 고슴도치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따뜻한 거리를 찿아낸다.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힘든 어려운 상황을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사실 고슴도치는 의도적으로 가시를 세우고 눕힐 수 있으므로 서로 몸을 기댄다고 찔릴 일은 없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중략) 달력 속에서 뚝, 뚝, /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중략) /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고정희의 ‘편지10’ 중에서
날파리가 별들 사이로 이리저리 떠도는 밤, 눈을 부릅 뜨고 명징한 언어를 찿아 나선다. 그대 가까이 가지 못한다 해도 절망하지 않기로 한다. 대책 없는 날의 생의 길찿기는 끝이 없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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