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아의 열려라 클래식] 연주장에서 마음의 기억
신비주의 예술가 뱅크시는 거리의 벽화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전쟁과 아동, 빈곤, 그리고 정치의 모순 등을 풍자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고 화제가 됐다. 그런 면에서 그림은 화재로 소실되지만 않는다면 두고두고 감상이 가능하고 세대를 거쳐 공감할 수 있다. 작품이 있을 공간만 있다면.
반면 음악은 어떨까. 물론 악보나 음반은 남는다. 하지만 연주회장에서 받는 감동은 어떻게 남을 수 있을까.
‘춤과 농담의 시간 여행, 쇼팽의 4막 12장 1인 음악극’. 연극 제목이 아니다.
지난달 패서디나 시티 컬리지에서 열렸던 피아니스트 장성의 특별한 리사이틀 제목이다. 예술가이자 예술 기획가로서도 이미 경지에 오른 피아니스트 장성이 세계 최초로 만든 구성이었다. 8곡의 왈츠와 4개의 스케르초가 이렇게 하나의 곡으로 연주될 거라고 쇼팽은 상상이나 했을까.
먼저 약 25분 동안 진행된 강연에서 장성은 이날의 연주가 왜 ‘춤(왈츠)과 농담(스케르초)의 시간 여행’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연주에서 총 12곡의 3박자 곡들은 단조와 장조를 넘나들고 절제 혹은 절망,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역동적 진행을 오갔다. 말 그대로 신들린 연주였다.
그는 4막 12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긴 여정에 청중을 초대했고 청중은 점점 그에게 몰입되어 어느새 그 여행의 끝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하나의 곡에서 다음 곡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아직 가시지 않는 여운에 또 다른 벅찬 감동마저 더해져서 마치 역경을 딛고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의 땀처럼 눈물로 승화되어 흘러내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스케르초 2번은 시작부터 그동안 쌓인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게 했다. 앞에서 연주되었던 8곡의 왈츠와 3곡의 스케르초는 이 곡을 위해 지나와야만 했던 여정이었다.
장성이 준비한 악극의 마침표로 연주되는 내내 마치 100여 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교향곡처럼 무대를, 청중의 가슴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이런 무대는 음반으로 전해 들을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녹음 기술이 있다고 해도 연주자와 공감하는 그 순간은 이미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연주회장을 찾는 이유가 된다.
뱅크시의 ‘풍선을 든 소녀’가 휴지통 속에 가고 있어도 사랑이 남듯이 무대 앞에서 느끼는 감동은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마음의 기억은 누구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손영아 디렉터 / 비영리 공연기획사 YASM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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