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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오이지

친구 A는 마켓만 오면 남편과 싸운다고 한다. 더운 여름에 마켓오는 게 힘든데, 온 김에 다 사고 싶은데, 남편은 뭐든지 못 사게 한다는 것이다. 오이 냉국도 먹고 싶고, 냉면에 들어갈 무도, 닭도리탕에 들어갈 당근과 양파도. 친구는 장바구니를 순식간에 가득 채웠다. 장을 볼 때는 다 해 먹을 것 같았지만 집에 돌아오니 사정이 달라졌다. 다음 날, 의사 체크 업 간 김에 점심 먹고 들어오고, 저녁은 고구마로 때우고, 주말엔 딸이 와서 오더해 먹었다. 냉장고에 넣은 채소들은 삼사일 지나니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채소들을 보다 못한 남편이 시장 보지 말고 사 먹자고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마켓에만 오면 나쁜 버릇이 고개를 든다. 무엇을 해 먹을지 몰라서 주섬주섬 다 담고, 필요 없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서 또 담고. 마켓이 몇 시간 거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안 사 놓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위기감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오래전, 안방에 다락이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의 벽 가운데를 크게 차지하던 벽장은 무슨 금고처럼 높이 달려 있었다. 애들이 함부로 열거나 하면 안 되는 곳이었다. 그 안에 말린 오징어, 리츠 크래커, 통조림 같은 것이 쌓여있었다. 어두컴컴한 그곳에 먹거리를  모아두는 어머니가 이상했다.  
 
오전 11시경, 나는 뜨거운 해를 피해서 밀짚모자를 쓴다. 장갑을 낀 손에 가위를 들고 목에 장바구니를 걸었다. 그냥 나갔다가 가지 꼭지에 난 날카로운 바늘에 손을 찔린 적이 있다. 길쭉한 보라색 가지 세 개를 땄다. 그 앞에 있는 고추밭에서 빨개지는 거대한 고추는 그냥 두고 말랑한 연한 고추를 한 움큼 낚아챘다.  
 
이제는 무엇을 딸까? 마당을 휘휘 둘러보았다. 담벼락을 차지한 넝쿨이 얼마 전부터 흉해졌다. 늦여름 해 밑에서 줄기는 노끈이 되고 잎은 누렇게 말라 버렸다. 사나운 몰골을 뜯어내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녹색의 길쭉한 오자미 같은 것이 달려있다. 죽는시늉 하면서도 어린 오이를 키우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니 오이는 팔뚝만큼 굵어졌다. 금방 딴 오이는 온몸에 송곳이 쭉 돋아있다. 제 몸 보호 장치가 서슬이 퍼렜다. 이번에는 물을 넣지 않고 오이지를 담갔다. 오이 10개 정도에 설탕, 소금, 식초를 동량으로 넣었다. 식초는 바닥에 조금 깔렸을 뿐, 두 겹으로 쌓인 오이는 멀뚱멀뚱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이지가 되려나? 다음날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오이 5개 정도가 반쯤 물에 잠겨 있었다. 매일 조금씩 오이에서 물이 나왔다. 일주일이 지났다. 오이는 서로서로 노랗게 익혀 주었다. 변덕스러운 여름날 퍼붓는 빗물을 제 몸에 품었다가 늦둥이에게 물을 주더니, 마지막에는 제 몸을 쪼그라뜨리면서 아삭한 오이지가 되어갔다. 다락 속에 먹을 것을 감추어 놓았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느 궁진한 겨울 저녁에 파인애플 깡통을 따는 어머니 옆에 우리는 올망졸망 모여들었다.  
 
오이지와 가지 복음, 구운 고추로 점심을 먹었다. 몇 달 동안 마켓을 가지 않았다. 과중한 내용물에 헉헉대던 냉장고는 휑해져서 냉기가 왕성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쌓여있던 팬트리는 바닥이 드러났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커피 한 잔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부추는 하얀 꽃을 흔들어 대고 있다. 몇 번을 잘라 먹어서 지금은 뜨악해졌다.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꽃대를 내보냈다. 다섯 흰 꽃잎들이 사선으로 흔들거린다. 9월의 앞마당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김미연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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