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6·25 때 잊지 못할 제자,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온 성경책
인민군 입대했다 포로된 제자
“선생님 기도 잊지 못해” 편지
석방 뒤에 국군 근무 소식 들어
그때 일어난 숱한 배신과 처형
인간 도외시한 공산주의 목격
자유와 인격의 가치 평생 믿어
“선생님 감시·체포하라” 명령에 불복
“6월 25일 전쟁이 보도되면서 선생님과 마지막 헤어질 때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떠나는 우리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는 눈물 머금은 기도입니다. 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성경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감시·보고하는 책임으로 참석하곤 했습니다. 2주쯤 지났을 때입니다. K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선생님을 감시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해 오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신촌에 있는 집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두 번째는 이화여대 김종필 목사 사모님의 얘기를 통해 선생님은 피란을 떠났고 가족들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같은 명령이 계속될 것 같아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습니다. 전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수용소 외곽을 감시하는 국군 중에 이 편지를 전하는 중앙학교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후에는 또 한 친구를 만나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귀순하고 국군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차례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허락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스러운 군인과 국민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선생님 옛날과 같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수용소에서 읽던 성경책을 동봉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군이 진해 부근 국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휴전과 더불어 나는 부산 중앙학교 분교를 정리하고 서울 본교로 복귀했다. 경찰 정보 관계 사람이 찾아왔다. 그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함경도 출신인 엄진기 선생과 나, 교련 장교로 있던 정 대위와 송 중위는 A급 반공 분자여서 체포·처형 대상이 되어 있었다.
B급 1번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의 사위인 김상을 선생이었다. 중앙학교 좌파 책임자 남로당원은 지리 선생인데, 정치적 발언은 별로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엄 선생은 좌파 학생들에 의해 체포되어 세상을 떠났다. 엄 선생의 두 아드님은 그 후 미국에서 한국 방송국 지사장을 하면서 반공 운동에 앞장섰다. 송 중위는 피신해 있다가 좌파 학생들에게 잡혀가 삼청동 숲속에서 피살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정 대위는 나와 같이 피란을 갔다. 정보기관 경찰은 나머지 반역을 한 선생들의 신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세상이 바뀌면 선생님만 불행해질 텐데 학생들에게 반공 얘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걱정해 주었던 박 선생은 후에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3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다”라는 불문과 선생은 “때가 오면 자결하려고 청산가리 독약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했다. 후에 고려대 교수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들은 북한의 실정을 체험했다는 고백이었다. 좌파는 아니지만 성격이 과격했던 선생들이 앞장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선생도 있었다.
다른 얘기다. 내가 오래 친분을 갖고 지낸 김여순 중고등학교 교장이 있다. 아끼는 제자가 좌파 선생의 지령을 받고 지내다가 경찰에서 조사받게 되었다. 김 교장이 직접 신분 보증을 서고 계속 사랑으로 키웠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6·25가 터지자 제자가 찾아와 제가 끝까지 보호해 드릴 테니까 집에만 계시라고 부탁했다. 어떤 날 잠시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제자가 집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이 집 앞에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피신했다. 후에 알아보니까 그 제자가 사복을 한 보안서원을 동반하고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김 교장은 모든 사람과 제자는 믿을 수 있어도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 탈출한 황장엽씨의 고백
내가 1962년 유럽에 갔을 때는 공산당원을 자처하면서 선전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1972년에 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는 지성인들을 자주 만났다. 20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은 진실과 인간애를 포기하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6·25 전쟁을 체험한 나와 같은 세대도 자유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공산 치하를 살아 본 사람들은 같은 정치적 과정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격의 가치를 염원하게 되면, 반공적 사명을 포기하지 못한다. 북한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던 황장엽씨도 인생 말년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그가 나에게 남겨 준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북한 동포와 굶주리고 있는 어린애들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아깝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인간다운 삶이 사라진 지 오래됩니다”라는 고백이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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