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한가지씩 떨구며 산다
어차피 써먹을 것도 아닌데 돈 들여 갱신할 이유가 뭐냐며 남편이 투덜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도대체 몇 년이 지난 거란 말인가. 아까비! 자격증 시험공부 하던 때가 생각난다. 하루 3시간씩 운전하며 출퇴근하던 교통지옥 속에서도 시험 때까지 부엌일 맡아 하겠다고 응원하던 남편. 회사 측에선 학원비 지원해 주고 강의 듣게 해 주고.
첫 시험에 낙방, 6개월 재수 후 결국 합격하고 내 이름 걸어 회사 차리고 열심히 알차게 경영하다 55세에 일찌거니 은퇴했다. 쉽게 잘 살았다는 뿌듯함으로 은퇴자의 신나는 삶을 산다. 은퇴와 동시에 자격증은 필요가 없다. 3년마다 갱신하지 않으면 그대로 없어진다. 왠지 서운해서 갱신하기를 몇 번. 그러다 완전히 시기를 놓쳤다.
나이 들어갈수록 두뇌 활동이 느려진다. 가끔은 통관사 관련 비즈니스에 관심 있는 지인의 질문을 받곤 한다. 내게 있는 통관사 자격증을 사용해 비즈니스를 하자고 묻는다. 자격증 대여 사업이랄까. 그럴 때마다 가슴 뿌듯했던 자긍심. 일종의 자산이었던 셈이다. 자격증에 버금가는 실력을 내 두뇌가 따라가지 못한다. 겨우 살려낸 자격증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제 아주 못쓰게 된 자격증에 나를 대입해 본다. 노기제 통관사. 회사 이름도 노기제 통관회사. 숨 가쁘게 바삐 돌아가던 시간이 내 두뇌에서 재생되어 펼쳐진다. 새삼 내게 환하게 웃어주고 싶다. 노기제. 잘했었구나. 대단했어.
이민 초기, 타이피스트로 직장을 찾으며 얻어걸린 두 번째 직장이 이름하여 CAL ASIA. 뭣 하는 회사인지도 몰랐고 인터뷰할 만큼만 가능했던 회화 실력. 겨우 소통이 가능한 영어로 배짱 좋게 시작했던 통관회사에서의 타이피스트 생활. 종일 각종 다른 양식의 폼을 메꾸는 타이피스트. 짧은 영어로 쉴 틈 없이 울려대는 전화에 응답하면서 턱과 어깨로 전화기 잡고 양손으론 타이핑. 퇴근 후 밤새 어깨 통증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거의 50여 년 전이다.
통관사 자격증 버리고, 좋아하던 암벽등반 버려야 하고, 수상스키, 스쿠버, 윈드서핑, 승마 등 날마다 한가지씩 뭔가를 버려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벌써 여러 가지가 내게서 떠났다. 쉽게 그리고 오래 할 수 있는 등산은 애초에 끊었다. 걷는 것이 너무 싫어서다. 이렇게 살다 보면 내게 남아있을 것은 무엇이 될까?
에너지가 따라주지 못하니 버리기 싫어도 못하는 것이 생긴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기던 운동이니 습관적으로 실내 암벽장 로프를 잡고 매달린다. 판단력이 느슨해져서 사고가 발생한다. 뭔가 달라졌다. 잘 안된다. 위험하니 그런 운동은 하지 마세요 라는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러면서 하나씩 떨구는 생활이 되고 있다.
노기제 / 통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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