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천개의 보라(하)
배롱꽃 지고 나면 /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 / 배롱나무 가까이 지날 때마다 떨어진 꽃잎 / 안타까운 내 마음이라 말하기로 합니다 // 배롱꽃 지고, 처진 가지 사이로 / 어둠으로 쓰러지는 밤처럼 하루도 저물고 / 꽃잎 몇장 새벽 이슬에 반짝이는 마음 / 당신을 생각하였노라 말하기로 합니다 // 같은 마음으로 걷고, / 같은 곳을 향해 눈빛을 맞춘다는 것 / 달빛 가슴에 담을 수 있다는 것 / 서로의 담이 허물어진 탓이라 말하렵니다 / 미시간호수 낮은 파도 소리 / 새해 첫 날 발끝까지 들렸던 소리 / 그 소리 일몰의 파도와 닮아간다 말하기로 합니다 // 침묵이 오래 이어진 날들 / 깊이 뿌리내리기 위한 것이 되려니와 / 반갑던 이름 모래알처럼 손틈으로 빠져 나가려할 때 / 그 이름 가볍게 부르지 않음은 / 한껏 피었다 지는 배롱꽃 나무 아래 / 시들기 전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어느 날, / 나에겐 늘 먼 곳이어서 바라만 보았던 / 별빛처럼 다가오지 않는 깜깜한 밤, / 밤처럼 아득해지는 당신의 웃음은 / 훠얼 훨 내 안에서 어둠으로 만져지고 / 나는 어둠으로 지는 밤이 되기로 합니다
글을 그림처럼 쓰고, 시를 그림처럼 그린다. 곽 시인의 시작노트에 쓰여진 글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 그의 하루하루의 삶이 노트 위에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책장이 넘겨진다는 것.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일 수도 있고, 혹은 필연적인 일일 수도 있어 오랜 시간 내게 허락되었던 길. 그 길을 걸었던 시간 속에서 수많은 날줄과 씨줄을 통과한 후 만나는 순간. 밤은 길었다. 보이지 않는 저 끝에서부터 반대편 저 너머까지, 밤은 까마득한 선이다. 휘청이지 않는 철심 같아서 의식은 곧게 깨어있어야 했다. 의식은 의식 위에서 매미소리 같은 여운으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까만 철심이 다리같이 뻗은 밤은 여전히 길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후 내일이면 꼭 한달이 지나간다. 가능한 무엇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시차를 이기려면 낮에 자지 말라고 하지만 졸리면 자고 잠들지 못하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몇일은 비가 쏟아졌고, 몇일은 뜨거운 햇살에 잔디가 타들어갔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엎드려 풀과 나무와 꽃과 놀았다. 머리속에 남겨지는 생각을 버리려고 푸른 나무 사이를 걷기도 했다. 꿈이 그려질수록 시간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다. 곽재구 시인이 ’꽃으로 엮은 방패’ 시집에 그림처럼 그려 내 손에 쥐어준 글귀, 한달은 배불리 먹고도 아직 버티고 있다.
신호철 선생님께- // 마음의 향기 소담하게 / 스민 아름다운 시화집 / 잘 보았습니다 고독했지만 / 행복한 날들 아니었겠는지요 / 삶의 남은 시간들 / 오래오래 물소리 같으시기를 // 2023. 6. 8 /은하수 갤러리 / 곽재구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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