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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삼전도 굴욕

아! 삼전도 굴욕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7년간에 걸친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한반도는 또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17세기 초 만주의 신흥세력 후금은 명과 대립하고 있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외교정책을 취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내치에 힘썼다. 그러나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사대주의에 젖은 관료들에게 깊은 반감을 사, 광해군은 결국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른바 인조 반정이다.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은 서인이었다. 새로 집권한 서인들은 철저한 ‘존명배청(尊明排淸)’노선을 취했다. 북방의 정세는 후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후금의 사신을 죽이려 하는가 하면, 후금에게 쫓겨 도망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근거지와 쌀 60만 석을 제공하여 후금의 분노를 샀다. 인조 10년(1636) 홍타이지(청태종)는 나라 이름을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앞서 체결한 형제지국을 군신의 나라로 바꾸자는 등 조선을 멸시하는 행동을 취했다. 이에 조정은 크게 반발하여 인조는 청의 사신을 만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청 태종은 즉위하던 해인 1636년 12월, 자신이 직접 팔기 등 1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친정에 나섰다. 아민이 이끄는 청군은 의주를 함락하고 대동강을 건너 노도와 같이 한양으로 몰려왔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별다른 방어 없이 우왕좌왕하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섰다. 그러나 청군의 선발대가 한발 앞서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강화도의 피난길도 막혀버렸다.  
강화 피난이 좌절된 인조가 결국 서둘러 피난간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조선군은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했기 때문에 성 내부로 퇴각한 12,000의 군사와 수만 명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물자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임금인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청군은 인근의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산성 내부를 직접 조준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1637년 1월, 조선은 화의를 청했다. 그러면서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들먹이며 명분을 세워달라고 간청하자 ,청 태종은 이렇게 대답했다.“기미년에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했을 적에 짐은 너희 나라가 싸울 줄 아는가 생각했고, 이제 또 싸움의 실마리를 열기에 너희 군사가 다시 정예하게 단련된 줄 알았지. 누가 아직도 군사가 제대로 단련되지 못했을 줄 알았겠는가. 너희 나라의 전란을 구할 자는 명나라뿐이니 천하의 모든 나라의 군사가 모두 이럴 것인가. 곤궁하게 산성을 지키며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으면서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이런 빈말을 하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1637년 1월 30일 아침, 인조는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산성을 내려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신하된 주제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며, 항복했으니 백마를 타고 나온 것이다. 청 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주었다. 항복한 조선(개)에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었다.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서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벌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야사의 기록에는 당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에 조선의 온 백성은 치를 떨고 분노했다.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에 당한 치욕이었기에 국왕, 신하, 백성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이것이 이른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다.  
그 결과 조선은 명나라와 단교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며, 청나라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를 지키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에 원병을 파견할 것 등을 약속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볼모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는 청나라에 잡혀가 죽음을 당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랜 옥고를 치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나중에 몸값을 바치고 풀려난 숫자만 해도 63만 명이었다고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 한 노파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여러 해 동안 강화에 성을 쌓아놓고도 그곳 벼슬아치들이 날마다 술만 퍼마시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죽게 만들었구나. 이게 누구의 죄더냐. 내 남편과 아들은 적의 칼날에 모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구나! 오, 하늘이여.”
‘삼전도의 굴욕’이 다시 떠오른다. 얼마 전 인터넷신문을 보다가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중국대사관저에 가서 싱하이밍 중국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장면이었다. 어쩌다 그 순간이 포착됐다고 해도 두 손을 모으고 앉은 이 대표 옆에 중국 대사는 정중하지 않은 자세로 있었다. 중국은 한국에 외교부 국장급을 대사로 보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세계 10위권 국가에 대한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하대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 직급의 중국 관리 옆에 공손한 모습으로 앉은 한국 다수당 대표를 보니  열불이 나고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싱 하이밍 대사는 이 대표를 앉혀 놓고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베팅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며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이 한국에 보복하겠다는 것이다. 대사가 주재국을 향해 이렇게 무례하게 하는 나라는 중국 아니면 없다. 중국은 세계 곳곳에서 무례하고 폭력적인 ‘전랑외교’를 펼치고 있지만, 한국에 대해선 더 그렇게 한다. 이 대표는 거기에 들러리가 됐다. 싱 대사는 그 자리를 빌려 시진핑을 우상화하는 발언까지 했다. “제 나라 독재자에 대한 저급하고 유치한 아첨을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태연히 하는 중국대사도 놀랍지만, 그걸 그냥 듣고 있는 이 대표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대표는 직전 대선에서 집권당 후보로 나섰고 지금은 압도적 과반 의석의 제1당 대표다. 그런 이 대표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외국을 상대하는 장소에선 국민의 대표라는 생각도 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대사가 ‘우리 편 안 들면 재미없다’는 협박을 하는데 듣고만 있는가.  
 
이 재명 대표는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한중이 협력하자는 말을 주로 했다고 한다. 중국 대사관저까지 찾아간 것도 오염수 문제를 정치적으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표는 정부를 공격하는 데 보탬이 된다면 우리 국격이 손상되고 중국 국장급 관리에게 훈계를 듣고 협박을 당해도 감수할 만하다는 입장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대표도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라면서 “한국도 작은 나라지만 (중국의) 그 꿈에 함께 할 것”이라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기 때문인가. 한국은 인구 5000만이 넘는 나라 중 소득 3만 달러가 넘은 세계 7국 중 한 나라다. G20 회원국이고 언젠가 G8 회원국이 될 수도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의 국민 입장에서 이 대표와 중국 대사의 만남은 참으로 불쾌하다.  
 
앞서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정부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보상 해법에 대해 ‘삼전도 굴욕’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정치에 소환되었다. 그렇다면 삼전도 굴욕은 누가 불러들였는가. 이것 하나만큼 은 분명히 하자. 삼전도의 굴욕을 야기한 것은 ‘글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 모르면서 한갓 허언만 일삼던 소인배들’이 아니었던가.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이 대표에게 ‘대체 어느 나라 정당의 대표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와 싱하이밍 대사의 만남은‘삼전도 굴욕’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대한민국 발전의 상징물이 된 123층 의 잠실 롯데월드 타워를 배경으로 삼전도비를 바라보노라면 심경이 착잡하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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