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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웅전] 망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1894년 무렵부터 극동의 4개국, 즉 조선(한국)·청나라(중국)·일본·러시아의 국정은 어수선했다. 한반도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잇따라 휩쓸고 가고, 청나라는 배상금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1895년 랴오둥반도를 잃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고, 러시아는 일본을 제압한 호기로움에 허세를 부렸으나 안으로 곪고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는 황제 니콜라이 2세가 26세에 등극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펼쳐지는 듯했다. 그러나 크림전쟁(1853~1856) 이후의 부채와 관료 부패, 황후 표도로브나와 요승(妖僧) 라스푸틴의 스캔들로 안팎이 어수선했다.
 
그러던 차에 청일전쟁 이후 랴오둥반도 상실로 절치부심하던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육전대(해병)가 뤼순(旅順)에서 대패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설마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오겠느냐며 무사태평이었다. 결국 러시아 발트 함대와 흑해 함대가 대마도해협에서 일본군에 전멸했다.
 
시종장이 패배 전문을 들고 황제 집무실로 허둥대며 달려가서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했지만, 황제는 “테니스 끝난 다음에 얘기하자”며 별일 아닌 듯 반응했다. 몇 시간 뒤 초주검이 돼 기다리던 수상 코코프체프가 다시 보고하자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궁실로 들어갔다. “주님의 뜻대로 되겠지.”(바바라 터크먼 『8월의 포성(Guns of August)』)
 


이러고도 전쟁에 이길 수 있을까. 러일전쟁이 러시아 왕조의 몰락과 소비에트 탄생의 신호였다는 해석은 왕조의 부패와 무관하지 않다.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고염무(顧炎武)의 말이 맞을 수 있지만, 군주가 무능하고 경륜이 없으면 국민의 애국심도 소용이 없다. 국민은 그런 왕을 위해 죽어야 할 이유도,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종(高宗)과 니콜라이 2세는 닮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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