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수양과 실천’의 여장부 장계향

‘내가 곧 우주’ 자존감의 경(敬)사상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 전경. 장계향과 남편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내려와 가문을 일군 곳이다. [사진 영양군청]](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3/05/26/f4a8f7bf-d6f7-4577-977e-300e65b8eefc.jpg)
장계향은 시집 가문의 중흥을 주도하였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입향조 이후 3대에 걸쳐 재지사족(在地士族·지방 지배세력)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특히 이함은 의령현감을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다량의 서적을 갖추어 놓고 후세 교육에 주력한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번영은 탁월한 재산 경영과 인(仁)의 철학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간 이함이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함의 네 아들 시청·시형·시명·시성이 출사할 즈음에 갑자기 몰아친 불운으로 가문은 위기를 맞는다. 차남과 장남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례로 급서하고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연달아 자결하는 변고가 발생한 것이다. 셋째 며느리의 사망까지 불과 5년 사이에 20~30대의 젊은 사람 5명이 사라져버렸다. 이 암울한 집안에 재건의 열쇠를 쥔 장계향이 등판하게 된다.
교육과 살림, 30명 대가족 이끌어
![2018년 영양군서 개원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전시장. [사진 영양군청]](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3/05/26/21a78db9-35d5-47d9-b60d-8fd4c6043b86.jpg)
![장계향이 남긴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 원본. [사진 영양군청]](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3/05/26/4e40f702-0f8e-4a7e-80ee-37b6ddc29697.jpg)
역병과 자연재해가 일상이 된 17세기의 외진 고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10남매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존과 다투는 날들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환경에서도 장계향은 직접 일구지 않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식 교육에 도전과 노력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강학 열어 자식들 미래 준비하자”
![장계향이 10세 전후에 그린 ‘맹호도’. [사진 영양군청]](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3/05/26/1cf91ca3-45c1-481d-b4d2-4624262ee16e.jpg)
석보 생활 12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체되고 나가고 들어오는 등의 구성원들 변화를 지켜보면서 더 산간 오지 수비(首比)로의 이거를 단행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더 나은 환경으로 옮기는 경우는 많지만 장계향 부부처럼 더 열악한 곳을 선택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모습이다.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 자식들은 직접 일해야 먹을 수 있는 생활을 선택하며 혼인한 자들까지 따라나서 식구는 20명에 이르렀다.
![장계향의 친정인 경당 장흥효 종택. 경북 안동시에 있다. [사진 안동시청]](https://news.koreadaily.com/data/photo/2023/05/26/3ed0e7d6-4244-432f-919d-3422b6e39741.jpg)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이 삶의 자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친정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소싯적의 장계향은 성인(聖人)을 꿈꾸었다. 그녀는 “성인도 사람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나도 노력한다면 성인이 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정부인장씨행실기’) 산간오지에서 보낸 30여년의 세월은 부모에게는 수양과 성찰의 시간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근본에 충실한 학문 연마의 시간이었다.
한국 음식문화사의 새 장 열어

무남독녀 장계향은 어머니의 타계로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데, 영해에서 안동 친정까지는 200리 길이다. 20대 중반 나이에 수십 명을 건사하는 주부였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배려로 친정살이하며 아버지 경당을 봉양한다.
그런데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을 통해 퇴계학을 전수하여 심학(心學)으로 발전시킨 대학자 경당은 수백 명의 문인에 학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섰지만, 대(代)가 끊긴다는 사실에서 딸이 가졌을 법한 비애는 짐작이 된다. 장계향은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킨 후 시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0여년 후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린 이복동생들을 자기 곁으로 데려와 돌보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학자로 성장하도록 정성을 다했다. 경당 가문의 후손들에게 장계향은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
훌륭한 아들들 키운 숭고한 삶
장계향의 아들 현일은 학문이 완숙해진 52세에 학행으로 출사하여 영남 사림의 종장이자 산림정치가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아들 휘일은 아우 현일과 합작으로 『홍범연의』를 저술하는데, 여기에는 국가 재건을 염두에 둔 경세철학이 담겼다. 다른 아들들도 학문으로 각자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절차탁마한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이함과 이시명, 그리고 휘일·현일 형제, 3대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기에 이르렀다.
85세 나이로 이시명이 운명하자 아들들이 모두 모여 여묘살이를 한다. 이때 이현일은 『논어』를 강론하고, 어머니 장계향은 『논어』의 실천과 일상화의 중요성을 말한다.(‘석계연보’) 장계향은 자신을 모시려는 소생 아들들의 청을 거절하고, 장남 상일에게 남은 생을 의탁한다. 추위를 막느라 업어서 등교시킨 60년 전의 그 아들이다. 전 생애를 오롯이 경(敬·수양과 실천)의 정신으로 일관한 장계향의 삶은 숭고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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