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삶] 봄 운동회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잊었다//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바람은 어느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 테이프를 몰고 갔다- 이성교 시인의 ‘가을 운동회’ 부분
교문 위에 ‘어울림 한마당 운동회’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가 열린다. 코로나로 삼 년 여 만에 열리는 운동회라고 한다. 전광판에는 미세먼지 제로, 일산화탄소 없음, 아황산가스 없음 등의 알림 표시가운동회 하기 최적의 날씨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번쩍인다.
만국기가 날리는 운동장, 학생대표가 개회 선서를 하고 준비체조로 운동회는 시작된다.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신나는 음악에 맞춰 한바탕 춤을 추는데 K팝 본고장의 지존들답게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춤 솜씨가 예사가 아니다.
아직도 완전히 마스크를 벗지는 못했지만 코로나로삼 년씩이나 함께 어울려 뛰놀지 못하던 아이들에게 이 운동회는 오월처럼 푸르고 신나는 날인 듯싶다.
청군과 백군 앞에 당당히 선 응원단장은 제법 멋진 제스처로 함성을 끌어낸다. 공굴리기, 이름도 생소한 바가지 쌓기, 장애물 건너기 등으로 경기가 이어진다. 운동회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달리기가 아닐까. 400 계주는 운동회의 꽃이다.
아이들의 함성으로 고조된 분위기가 요즘 지친 내게 기운을 돋아 주는 것 같기도 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구경했다.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 외국인이 있어 말을 걸어 보았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남성과 결혼한 딸을 보려고 한국에 왔다고 한다. 애들 부모가 바빠서 손녀를 돌봐주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손녀딸과 함께하는 운동회가 좋은 추억이 될 거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할머니의 역할은 어디 민족에게나 전천후인가보다.
예전에는 운동회가 주로 가을에 열었었는데 요즘은 봄에도 열린다. 운동회는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함께하는 유일한 고을 축제였다. 모처럼 일손을 놓고 구경 온 가족들과 돗자리를 펴고 나무그늘에 앉아 김밥과 사이다를 맘껏 먹을 수 있고 부모님들의 응원을 받으며 으스대보기도 하는 날이기도 했다. 달리기를 곧잘 하던 나는 400 이어달리기 마지막 주자가 되어 힘껏 달리던 기억이 새로워 운동회를 보는 내내 신이 나기도 했다.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삶의 긍정성은 어릴 적 환경에 기인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기질이나 성격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행복이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흡입력은 행복한 유년의 밭에서 커진다고 한다.
유년기란 한 인생을 지탱해주는 지지대와도 같은 시간이다. 행복한 아이가 행복한 어른이 된다. 아이들이 마음의 부침 없이 자라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운 함성으로 부픈 오늘은 아이들의 기억창고에 행복하게 저장될 것이다.
길을 지나다가 마주친 운동회는 오래된 동화책을 창고에서 찾아낸 때와 같다. 나도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게 사실이면서도 기이하고 낯설다. 나이라는 흔들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초원을 달리고 싶은 오월이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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