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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호수는 잔잔합니다

나를 잃어버리기로 한 후 편해졌습니다 / 비 내리는 Lake Geneva에 서있습니다/ 마음 두드리는 빗소리가 나를 멀리 밀어냅니다 / 무대에는 호수가 나와 헨델의 미뉴에트를 연주합니다 / 관객은 흔들리는 배 한 척, 노란 부리의 새 가족, 그리고 나 / 호수는 빗줄기를 먹고 꽃이 되었습니다 // 호수는 잔잔합니다 / 이곳을 향했던 마음 같이 잔잔합니다 / 일렬로 갈아놓은 밭고랑같이 적막하기도 해서 / 차창에 부딛혀오는 빗방울 피해 막다른 길 / 호수가 내려보이는 통나무집에 삽니다 // “당신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 /거침없이 직진하는 당신은 내게 산입니다 / 따져보면 틀릴 게 없는 당신은 안개입니다 / 지난 후 선명하게 올 곧은 당신은 스승입니다 // 꽃이 되지 않아도 피어나는 모든 건 꽃이랍니다 / 호수는 비에 젖어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 나는 비에 젖어 호수가 되려합니다 / 모두는 살아나는 지느러미가 되었습니다 / 호수는 큰 호흡 속에 잔잔합니다
 
[신호철]

[신호철]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포치에 앉아 있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한번도 와본 적 없는 생소하고 낯선 곳. Lake Geneva 맞은편에 위치한 한적한 작은 마을입니다. 요란한 불빛도 없고 사람들의 소리도 끊긴 마을 간혹 트레일러에 보트를 달고 들어오는 차량소리가 적막을 깨웁니다. 저녁 늦게,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간간히 비가 뿌렸고 하늘엔 별하나 뜨지 않았습니다. 호수의 물결은 푸른빛 하나 없었고, 도시의 소음은 찿아볼 수 없는 적막한 밤이었습니다. 밤새 호수는 잔잔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비가 그치고 산들한 바람이 스치는 날씨, 아침 일찍 물가로 나왔습니다. 호수로 향한 나무 데크 끝에 앉아 오랫동안 찰랑거리는 물결을 바라 보았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이는 바람도, 반가운 새소리도, 조용한 고요 속에 젖어 들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랜 시간 앉아 있었습니다. 눈 녹듯 사라지는 시름과 걱정들은 호수의 표면에 아롱지는 작은 파장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서 꽃은 피워서 꽃이 아니라 자라나는 모든 것은 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수의 물결 소리도, 바람에 눕는 들풀도, 귓전에 울리는 새소리도, 눈에 비쳐오는 풍경도, 그곳을 지나 걷고 있는 한 사람도 꽃이 될 수 있다는. 이어폰을 끼고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곡 Hendel의 ‘Menuetto in G Minor’를 들으며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스쳐가며 쉼을 누렸습니다. 계획된 일도 없으니 조급할 이유도 없어 긴 아침을 즐겼습니다.


 
음악 용어 중에 불타오르듯이 연주하라는 아세소(access)가 있는 반면 천천히 연주하라는 아다지오(adagio)가 있습니다. 활발하고 쾌활하게 노래하라는 알레그로(allegro)가 있고 노래하듯 서정적으로 부르라는 칸타빌레(cantabile)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마음가는대로 부르라는 리비텀(libitum)도 있습니다. 음악 용어를 찿아 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우리 삶의 모습들을 단면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아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용어들을 노래로 혹은 연주로 시작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음악부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쉰다는 의미의 쉼표(rest)입니다. 이 쉼표를 무시하면 음악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삶의 일상에서도 이 쉼(rest)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목표를 향해가는 길목에 거침이 됩니다. 쉼 없이 달리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어쩌면 균형을 잃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친 후엔 늘 잔잔한 파장이 옵니다. 자라나는 모든 것들은 겨울이라는, 단단한 씨앗의 껍질이라는 쉼을 지난 후 싹을 냅니다. 오늘 잔잔한 호수를 바라다보며 쉼을 배웁니다. 그리고 나도 긴 호흡을 쉬어봅니다. 레이크 제네바에서.(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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