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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고요가 울었다

‘눈 속을 걷고 싶었다. 그저 눈밖에 없는 홋카이도, 황혼이 가까워져 짙은 남색을 띠는 하늘에서 펑펑 펑펑 펑펑 무거운 눈이 내렸다. 추위가 더욱 매서워졌다. 두툼하게 쌓인 눈에서 발을 뽑으며 걸어야 했기에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뜨거운데 추웠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바늘 같은 쨍하는 울림 뒤에 시야가 깨끗해졌다. 저 멀리 산맥의 윤곽,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 장갑의 섬유 한올 한올, 토해내는 숨의 하얀 덩어리…깊은 고요가 눈앞의 광경에 깊이를 더해 주었다. 훨씬 순도 높은 고요, 깊은 정적, 고요가 울었다. 아무것도 없는 설경 속에서 고요의 울음을 들을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예기치 못한 일에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사이토 하루미치의 ‘목소리 순례’ 중의 한 부분이다. 작가는 청각장애인 사진작가다. 1983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선천성 난청으로 힘들게 일반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는 농아학교로 진학한다. 거기서 그는 수어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되고 5년 동안 즐겁게 학창 생활을 마친다. 그 후 사진전문학교에 다니며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스무 살까지 보청기는 그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한 한 일부였으며 보청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저주 같은 속박을 농학교에서 보낸 5년이 풀어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청기를 더듬으며 새날을 시작한다. 순간 소리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청기가 쉬지 않고 소리를 잡아서 뇌로 집어넣는다.  
 
세계는 소리로 되어 있다. 그것도 섣부른 소리 말이다. 내 목소리,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잡음, 그리고 주위의 소리가 소용돌이치면서 귀로 밀려든다. 울려 퍼지는 잡음 폭풍에 귀와 직감을 집중해서 그에게 필요한 소리만 골라낸다. 이것이 보청기를 통한 ‘듣기’였다. 듣기는 모든 신경을 소모하는 행위일 뿐 그와 같은 노력과 결과의 불균형 속에서 소리는 흉기가 되었다. 모든 소리는 마음을 도려내는 칼날이었다. 잠들기 전에 보청기를 뺀다. 그래도 여전히 시끄럽다. 온종일 들었던 잡음이 이명으로 남아 머릿속에 울린다. 폭력적으로 밀려오는 잡음은 새까만 어둠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뇌를 찔렀다. 그는 늘 긴장했고 그런 삶은 그를 우울하게 했다.  
 


어느 날 혼자 보청기를 빼고 설경을 찍으러 홋카이도에 갔다. 그날 그 설경 속에서 들은 고요의 울음소리는 단순하지 않았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각각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무한한 이야기였다. 목소리가 내린다. 계속 내린다. 펑펑 목소리가 내린다. 목소리가 끝없이 내린다. 말이 없는 침묵 속에서만 태어나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는 표면적인 차원에서는 들을 수 없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만 행동이나 자연현상의 침묵 속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눈빛을 통해서도 침묵 사이에 전해지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가 평생을 청각장애인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농아학교의 한 국어 선생님과의 조우는 그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그가 농아학교에 와서 마음의 재활을 받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여기고 그에게 다가와 눈빛을 보냈다. 진실한 말은 표현할 수 없는 의미로 가득하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꽃을 피운다. 보이지 않는 따뜻한 손이 되어 마음에 와 닿는다. 대화란 이해할 수 없는 다름을 서로 받아들이면서 관계를 맺기 위한 행위다. 근 위측증 환자의 지문자(글자 하나하나를 손과 손가락 모양으로 나타내는 대화법)를 떠올리는 동안 주먹과 보자기 모양으로 허공에 멈춰있는 손 사이에서 목소리가 피어난다. 다운 증후군 환자는 몸의 목소리로 말한다. 정적만큼 소리로 가득한 것이 없다. 심장의 울림을 빛으로 바꾼다. 그가 사진작가가 된 이유이다. 시각 장애인은 음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청각장애인은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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