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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책 9권

꽃가루 알레르기로 집안에 갇혀 있던 어느 날, 겨우내 쌓인 먼지로 더럽혀진 차 트렁크를 열고 책이 든 종이백을 꺼냈다. 내 손이 거칠어서였겠지. 백이 찢어지고 9권을 들고 들어 왔다. 며칠 전 문학교실 사람들의 오찬 모임이 있었다. 끝날 무렵, 한 문우가 영어책이 담긴 종이백을 주었다. 지난 몇 년간 만나지 못한 한 여자 문우가 나한테 전해달라고 했단다. 책을 전달하면서 그는 내가 영어책을 좋아할 것으로 그녀가 생각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처음 ‘달라고 하지도 않은 책을 왜 주었을까’하고 생각했다. 분명 읽어 보라고 기증했을 것이다. 요즘은 머리가 복잡해 겨우 신문이나 보고 있는데 이 많은 책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고맙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 생각을 달리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아프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고, 따라서 소중한 책을 나에게 주고 싶어 했을 것이 아닌가. 그다음 날 다른 문우로부터 한국어책 한 상자를 그녀로부터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지금 한 생애를 정리하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책을 들여다보았다. 깨끗한 것으로 봐 읽은 것 같지 않고 대부분이 간행된 지 10년 내외의 인기 소설들이었다. 나는 추리소설, 생소한 주제의 책은 서재에 꽂아두고 우선 3권을 읽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고국을 떠나 세계를 지붕 삼아 타국에 살면서 시와 에세이를 써 온 Alastair Reid 전집이다. 그는 서문에서 “다른 나라에 산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며 ‘땅과 삶’(Land&Life Relations)를 조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또 문학의 진정한 의미는 글을 통해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가끔 내가 쓰는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는 인사를 받는다.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는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여행하면서 가끔 기억에 남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지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여행 중 플로리다에 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오래된 성당만 보면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는 온화한 부인을 만났다. 어느 날 “누구를 위해 기도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신을 위해(For You)”라고 대답했다. 의외였다. 그냥 같이 여행하는 일행일 뿐인데. 나는 농담으로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하고 말했다. 성당에서 나오는데 “Did  you pray for me?” 하고 물었다. 엉겁결에 “Yes” 하고 말했다. 곧 후회했다. 사실 나는 교회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는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서울의 친구를 위해 기도했을 뿐, 같은 그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버스에 앉자마자 “저 진실한 크리스천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믿고 아름답게 살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다.
 
나도 서서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마무리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동시대를 사는 지구인과 더 많은 접촉을 갖는 것이다. 영겁의 시간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인연은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피부 색깔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세기를 살다가 사라질 것이다. 늦기 전에 낯선 나라를 찾아 그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타국을 다닌 후 언젠가 내가 태어나 30년을 보낸 고향을 찾아 흙 다시 만져 보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마지막 인사를 드린 후 냇물에 발을 담가 볼 것이다.
 


유년 시절의 그 집, 그 뒷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아이들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 몸이 나를 버릴 때가 온다고 느낄 때, 내가 소중히 간직해 온 책을 나누어 줄 것이다. 한국말 시집은 시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영어 소설은 손자들이나 친구들에게 전해 줄 것이다.
 
내가 한 생애를 정리하는 문우로부터 책 9권을 받은 것처럼. 그녀는 울면서 책을 버리지 않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주었을 것이다.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최복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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