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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또 하루가 열리고

또 하루가 열리고  
 
신호철

신호철

 
하얀 도화지  
손도 없고 물감도 없는데
시간이 그림을 그립니다
하루가 그려집니다  
파란 하늘 희망 한 줄 길게


연두 초록 생명 파릇이 피고  
노랑 보라 붉은 꽃봉오리
신비한 생명 태어나는
하루가 눈물겹습니다
 
파란 하늘을 향해
푸른 소나무 그 키를 키우고
이팝나무 하얀 꽃잎  
눈처럼 내려와 쌓이는데  
외줄 곡예 시선을 이으며
하얀 도화지 위로  
시간이 그림을 그립니다
어느 날 기도처럼
하루가 눈물겹습니다
 
 
며칠째 겨울 날씨답지 않게 비가 내렸다. 잠깐 내리다 그친 비가 아니라 하루 종일 내렸다. 쌓였던 눈들이 비에 녹은 후 드러난 푸릇한 잔디는 봄을 재촉 하는 듯 보인다. 분명 시카고의 겨울은 처음 기억할 때처럼 혹독한 겨울은 아닌 듯하다. 그저 서너 일 춥고 폭설도 몇 차래 오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더니 그 말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 지고 있다
 
겨우내 마음은 춥고 공허했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두렵다기보다는 마음 한 구석을 어느새 차지해 버린 그를 향한 그리움이라 표현함이 맞을듯하다.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걸음 거리, 웃는 표정, 기분 좋은 목소리와 함께 배경의 풍경과 음악과 커피 내음과 걸었던 거리의 발걸음 모두가 기억된다. 그 뿐 이겠는가? 그가 나를 대했던 따뜻한 마음과 태도, 도와주려는 배려와 솔직한 표현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 마음속의 한 부분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마음을 다 알 순 없지만 오랫동안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나의 맘속에 집을 짓고,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하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함께 잠들고 깨어나기 때문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오랜만에 뒤란을 둘러 보았다. 눈이 녹은 탓인지 잔디는 축축 했지만 파랗게 살아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솟아날 싹들이며 꽃 대궁들이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나무 잔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드나드는 새들의 지저귐도 햇살의 틈새로 살아 나고 있다. 청청한 소나무 주변엔 릴리와 옥잠화의 싹이 언 땅을 헤집고 모습을 드러내고 그 언저리마다 땅이 불룩히 솟아나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야 한다. 정지돼 있다는 것은 죽어있다는 말과 같다. 희미해진 것들이 선명해지고, 기대할 수 없었던 마른 가지에 싹이 트고, 움이 솟는다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미미한 실개천 이 강이 되고 그 강 줄기가 마침내 바다로 만나는, 낮은 곳을 찾아 흐르고 흘러 마침내 더해져 지구의 반대편까지 길이 되어 만나게 되는 것. 사람의 일도 그러하리라. 하루 하루의 삶이 모아져 내가 되어지고,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숨쉬지 못하는 하루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포기하고 잠들은 하루하루가 무료하게 지나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루만큼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의 개념은 보여지는 현상, 존재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기에 때로 언어가 불러오는 오해에 직면하기도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다는 명징한 사실이어야 하기에 시간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그러므로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입증하려고 하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설명을 하면 할 수록 봄이 오는 의미는 사라져갈 것이기에 나는 오늘 만남과 헤어짐의 문제도 침묵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연히 품고 있는 나이테를 성근 껍질로 감싸고 있듯이, 소리 없이 흐르고 흐르는 물줄기가 끊임 없는 깊은 바다의 품에 안기듯이, 언 땅을 헤집고 나온 싹이 제 몫을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후에 소리 없이 제 몸을 꺾듯이, 나는 그의 생각과 그리움을 내 몸에 키우며 가꾸다 어느 날 홀연히 날 부르시는 음성에 본향으로 돌아가리라. 다만 살아가는 동안 꽃을 피우고, 그 향기에 즐거워하는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리라. 그리고 산산히 부서지고 뿌려지리라.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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