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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리셋 (Reset)

냉장고가 또 말썽이다. 얼음통의 얼음이 녹아내려 부엌 바닥이 흥건해졌다. 김치병에서는 국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일단 전기 콘센트를 뽑았다. 풀이 죽어버린 채소랑 과일을 차고의  작은 냉장고로 옮기고 물 먹은 종이처럼 늘어진 냉동고의 고기와 생선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맛있게 빚은 만두도, 잘 재워둔 불고기도, 소금 살살 뿌린 고등어도 모두 버려졌다.  
 
싱크대와 아이랜드 위는 온통 냉장고에서 나온 음식으로 난리법석이다. 겨우 두 사람 먹는 식탁을 위해 어쩜 이렇게 많은 것이 들어있었을까.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그것도 버리기 시작한다. 구석자리에 들어박혀 곰팡이가 살짝 핀 명란젓이 있고 유효기간이 지난 치즈도 있다. 하나둘 버리고 보니 쓰레기통이 또 꽉 찬다. 벌써 몇 번째 갈아 끼우는 쓰레기 봉지인지 모르겠다.  
 
수리 기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일 아침에 오신다니 그때까지 청소나 깨끗이 해 두자 싶어 서랍을 모두 꺼내어 식초 섞은 물로 씻고 냉장고 안도 구석구석 닦아내었다. 음식을 가득 안고 힘겨워 보이던 큰 덩치가 가뿐해졌다. 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벽이랑 바닥이 해방, 해방이라며 환호하는 것 같다. 몇 달 치의 먹거리가 버려졌는데도 이상하다. 기분은 좋다.
 
북새통 부엌을 일부러 외면하며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기사님이 오셨다. “요즘 제품은 컴퓨터식이라서 한번 고장 나면 손을 볼 수가 없어요. 버려야 해요.” 기사님은 냉정하게 말했다. 겨우 8년을 쓰고 버려야 한다니 너무 아쉽지 않은가. 어제저녁부터 아침 내내 청소를 한 것도 억울하고 새 냉장고도 구입해야 할 생각에 속이 상한다. 턱밑에 손을 괴고 식탁에 앉아있는 내가 딱했던지 기사님은 일단 한번 전기 연결이나 해보자며 전기선을 콘센트에 꽂았다. 갑자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컴컴하던 냉장고 안에 환하게 불이 켜진다. 고개를 갸웃하던 기사님이 벽 안쪽의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는 “어? 작동하네” 한다. 어머나, 어머나. 나는 냉장고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컴퓨터식 기기는 과부하에 걸리면 멈추기도 해요. 그럴 때는 리셋을 하면 될 때가 있어요.” 리셋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새해라며 연하장이 무수히 날아다니더니 어느새 1월이 다 가고 또 2월이 되어버렸다. 새 달력을 걸며 뭔가 달라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한 달이 다 가도록 계획하고 결심한 일은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타성에 젖은 일상이 선두에 서서 바쁘게 나를 끌고 다니기 때문이다. 새로 받은 시간에 정장을 입혀 품위 있게 걷고 싶었는데. 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곰팡이가 슬어있는 욕망이나 폐기 처분해야 할 습관까지 안고는 허덕이며 가고 있는 나를 본다. 새롭게 시작하려고 나무는 해마다 죽는다고 하던데 나는 언제까지 죽일 것과 살릴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세월에 밀려서만 다닐 건가. 하얗게 몸을 씻은 냉장고처럼 일상의 재정비는 2월이라도 늦지 않다. 리셋. 그래, 오늘부터 내 삶도 리셋(reset)이다. 

성민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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