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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달력을 읽다

새로 만나서 인사하고 옆에 앉은 올해 첫 번째 달이 슬렁슬렁 지나가는 걸 바라본다. 누구는 세월이 빠르다 하고 누구는 기다리는 그 날이 왜 이렇게 천천히 오는가 조급해한다. 네모 칸을 그려 놓고 하나씩 담아놓은 하루라는 시간이 나란히 걸려있는 달력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바라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챙겨보는 날짜와 요일이 어김없이 말을 걸어온다. “여기 당신의 오늘이 있습니다.” 내려놓은 달력이 말한다. “어제 당신의 오늘이 여기 쓰여 있습니다.” 과거라는 이름의 지난 시간과 역사라는 이름의 지난 세월이 겹겹이 쌓여있는 달력이라는 이름의 기묘한 도구가 어느 땐가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오래전 대한민국 정부수립 되던 해에 만들어진 달력 한장이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다. 열두달을 한장에 인쇄한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갱지 위에 조잡한 그림과 광고가 함께하는 그런  달력이다. 그때는 그래도 환영받는 귀한 것일 그 안에 단기 몇 년과 서기 몇 년이 나란히 찍혀있다. 겨우 나라 이름을 찾고 우리 힘으로 우리 것을 만들어 가려는 정성이 빛바랜 열두달 숫자 위에 스며있다. 어렵사리 모양만 갖춘 어설픈 외모가 오히려 웃음을 짓게 하지만 그때의 하루하루를 되돌아보면 우리말을 찾고 우리글로 써넣은 우리의 달력 안에서 채워가던 보통사람들의 생활과 새 나라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전쟁의 참화와 숨 가쁜 사건들을 겪어내며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내 서랍 속에 보존되고 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낡은 달력 한장이 소중하게 여러 가지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 번쩍거리는 날짜를 소유한 우리에게 가난한 날짜가 같이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전하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살림이 조금 나아진 때를 맞이하여 잘 만들어진 달력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연말에 건네주는 괜찮은 선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광택이 나는 두툼한 종이 위에 멋을 부린 글씨들이 보기 좋게 나열되고 여러 가지 유명한 그림과 사진이 위세 좋게 자리 잡고 있는 나아진 생활에 걸맞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눈부신 설경이 아름다운 설악산이나 알프스의 전경이 자리 잡은 것을, 이름만 들었던 기억 속에 화가들의 그림이 새겨진 것을, 가보기 쉽지 않은 먼 나라의 풍경이 가득한 것을 혹은 눈에 익은 우리들의 보물들이 가득한 것 등으로 꾸민 달력을 마련하여 집안 눈에 띄는 어느 벽에 귀중하게 걸어두어 장식으로 삼았다. 회사나 단체의 홍보를 맡은 부서는 연말에 아주 중요한 업무가 홍보용 달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이 달력을 받아든 사람들이 자기 집 중요한 자리에 놓아두고 일 년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홍보 업무였고 달력의 효과였다. 그래서 달력 속에 그때의 풍조와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한국인들은 두 개의 문화를 갖는다. 떠나기 전까지 아니면 그 후에도 여전히 영향을 받는 한국문화를 지니고 살면서 또 하나사는 나라의 문화도 함께 해야 한다. 달력이 갖는 문화적 기능에 의하면 그래서 떠나온 한국인들은 두 개의 달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명절이나 기념일이 표시되는 한국적 달력과 사는 현지의 공휴일이나 특별한 날이 표시된 현지의 달력이다. 떠나 왔기에 누리는 문화적 풍성함인지 생활의 복잡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두 개의 문화를 접하는 남다른 삶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대다수의 한국인은 한국이 기록되어 있는 한국적 달력을 언제나 찾고 있다. 손안의 전화기가 여러 가지를 담당하면서 달력 기능도 넘겨받아 집안에 중요하게 자리 잡던 달력이 그 위치를 잃어가고 있지만 그 전화기 속 달력도 한국적인 달력의 내용을 갖추고 있음을 본다.
 


외모로 드러나는 도구의 모양이 어떻게 바뀌든 그 속에 담기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쓰는 사람들에 따라 정하여진다. 여러 가지 그 모양을 바꾸어 온 달력이지만 달력 속에 글자로 표시되는 하루하루는 바뀌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달력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고 달력에 올려놓을 새로운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안성남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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