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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동은 왜 빌라왕의 제물 됐나…청년 등친 ‘꾼’들의 술수

 서울 강서구 화곡동은 신축빌라가 많은 대표적인 ‘빌라촌’으로 꼽힌다. 사진 서울시 에스맵
제약회사에 다니는 김모(37)씨는 2016년 7월 서울 화곡동의 ‘희망부동산’을 찾을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다. 환승 없이 출퇴근이 가능한 ‘5호선 화곡역’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전세 1억 7000만원, 7평 투룸 신축 빌라는 그에게 최적의 신혼집이라고 결론 내렸다. 등기부등본과 토지대장도 깨끗했다. 김씨 부부는 이곳에서 2년간 거주한 뒤 경기도권 20평대 아파트로 이사해 아이를 갖자는 계획을 세웠다. 김씨는 “계약 당시 집주인도 만났다. 풍채도 좋았고, 이상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2019년 집주인 강모(56)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강씨가 전세보증금을 반환해주지 않은 채 잠적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지난 4일에야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를 알리는 서울남부지검의 보도자료에는 ‘화곡동 무자본 갭투자 깡통전세 사기 사건 수사결과’라는 표제가 달렸다. 화곡동에서만 빌라 283채를 매수한 뒤, 전세 보증금 31억6800만원을 돌려주지 않은 이른바 ‘화곡동 빌라왕’ 사건이다. 검찰은 강씨에게 보증금 반환능력이 없음을 알고도 김씨 등에게 입주를 권유한 희망부동산 중개사도 함께 재판에 넘겼다.

김씨는 “전세사기 피해를 본 이후로 2세 생각을 아예 접었다”며 “속이 타오르는 느낌에 새벽 2시면 계속 잠을 깼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힘들어 심리상담까지 받았다”고 그간 고통에 대해 토로했다. 그는 경매에서 4번 유찰된 이 집을 낙찰받기 위한 절차를 준비 중이다.

희망부동산 측이 지난 2019년 폐업을 알리며 세입자들에게 보낸 안내문. ‘빌라왕’ 강모씨의 전세금 반환 불능으로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힘들어서 폐업 준비 중”이라고 밝혔으나, 검찰은 희망부동산 대표 A씨가 전세사기를 공모했다는 혐의로 지난 4일 강씨와 함께 기소했다. 사진 제보자 제공
화곡동에서 깡통전세를 놓고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은 ‘빌라왕’이 강씨만 있는 건 아니다. 전국에 빌라 1139채를 소유한 채 지난해 10월 사망 상태로 발견된 ‘원조 빌라왕’ 김모(43)씨가 화곡동에서 80채를 집중 구매했고, ‘빌라의 신’으로 알려진 권모(51)씨도 44채를 보유했다. 빌라 240여 채를 사들여 전세사기에 활용하다가 2021년 7월 사망한 40대 빌라왕 정모씨 등도 모두 이 일대에 여러 채의 빌라를 보유했다. 공간 인공지능(AI) 기업 빅밸류가 8일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한 전국 다세대·연립주택 100채 이상 소유자 통계에 따르면, 화곡동에선 41명이 1602채를 나눠 보유하고 있었다. 1인당 평균 40여 채를 보유한 꼴이다.

그러다 보니 보증금 미반환 사고도 압도적으로 많다. 지난해 11월 기준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파악한 상위 30위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집중관리 다주택 채무자(악성 임대인)의 지역별 통계에 따르면, 화곡동에서 발생한 전세금 미반환 사고는 737건으로 압도적 1위였다. 경기도 전체의 미반환 사고(788건)와 맞먹고, 서울 전 지역 사고(1769건)의 41%가 집중됐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화곡동은 어떻게 전세사기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폭심지)가 됐을까. 전문가들은 서울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재건축·재개발이 쉽지 않고, 값싼 신축 빌라가 계속 생기는 동네라는 점을 지적한다. 서원석 중앙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강북에도 빌라촌이 여럿 있지만, 대부분 재개발·재건축 가능성이 있어 ‘꾼’들이 몰려들진 않는다”며 “그런데 화곡동은 ‘비강남’ 중에서도 가장 강남과 멀고, 인근에 김포공항이 있어 고도 제한·소음 문제로 재개발·재건축이 요원한 신축 빌라가 많다”고 분석했다.

화곡동(6.33㎢, 법정동)은 화곡본동, 화곡1~8동, 우장산동 등의 세부 행정동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있는 우장산동(1.36㎢)과 화곡6동(1.11㎢), 화곡3동(0.53㎢)을 뺀 나머지 빌라 밀집 지역(3.33㎢)에서 대부분 나왔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빌라는 아파트처럼 시세가 일정하지 않아 값을 사기치기 쉽다”며 “더구나 신축 빌라들은 직접 가서 보면 깔끔하고 빌트인 가전까지 구비돼 있어 주택 임차 경험이 많지 않은 사회초년생, 1인 가구, 신혼부부 등 취약계층이 몰린다. 구조적인 전세사기 양산이 용이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실제로 피해자들 중에는 청년층이나 취약계층이 많았다. 지난 4일 만난 ‘40대 빌라왕’ 사건의 피해자 윤모(38)씨는 “상경한 지 10년, 월세 4번을 전전한 끝에 얻은 첫 전세가 사기였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집주인이 사망하면서 윤씨의 전세 보증금 2억 2800만원은 허공에 붕 뜬 ‘없는 돈’이 됐다. 전세 대출 80%는 고스란히 1억 8000만원의 빚으로 돌아왔다. 윤씨는 “다른 동네에서 전세 2억 원대 매물은 반지하 아니면 원룸인데, 화곡동 신축 빌라들은 저렴한 가격에 1인 가구에 최적화된 1.5룸~2룸이 많았다”며 “살기 좋은 동네라고 생각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사망한 40대 빌라왕 정모씨 피해자 한모(31, 왼쪽)씨와 윤모(38)씨. 김정민 기자
2019년 화곡1동에 둥지를 틀었다가 ‘원조 빌라왕’ 김씨에게 돈을 떼인 송모(30)씨도 “인생의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고 한탄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HUG로부터 김씨 사망에 따른 보증채무 설명회가 열린다는 공지 문자를 받고 나서야 자신이 전세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송씨는 올해 6월 입주하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지만 “묶인 보증금 2억 4150만원을 다 돌려받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 잔금을 치르기 위한 고금리 대출 등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망한 40대 빌라왕 정모씨 피해자 윤모씨의 전세 계약서 일부. 특약사항에 임대인은 전세보증보험 가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넣었지만, 보험 가입이 완료되기 며칠 전 정모씨가 사망하면서 보험을 들지 못했다. 윤모씨는 “정모씨 피해자의 90%는 나와 비슷한 이유로 전세보증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진 윤모씨 제공

화곡동이 전세사기의 ‘그라운드 제로’로 주목받으면서 우울한 건 주변 부동산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화곡동 O부동산 여모(48) 사장은 “금리 인상과 화곡동 전세사기 보도 이후 손님이 뚝 끊겨 너무 힘들다”며 “장사를 접은 동네 부동산이 주변에 많다”고 말했다. 인근 동네인 마곡동의 H공인중개사 사장은 “화곡동 토박이 부동산들은 빌라 전세는 돈 안 된다고 손 안 댄다”며 “대부분 젊은 분양사, 중개사들이 건물 8~9층에 사무소를 차려놓고 사회초년생들을 사기 매물로 끌어들이는 것 같다. 청년이 청년에게 사기치는 동네가 됐다”고 말했다.


당국과 피해자들의 관심은 ‘빌라왕’들에게 배후나 공범이 있는지로 쏠리고 있다. 사망한 40대 빌라왕 정모씨에게 보증금을 떼인 피해자 한모(31)씨는 “대출 이자가 부담된다고 하니, 부동산 중개업소 직원이 ‘건축주가 이자를 지원해준다’고 꼬드겼다”며 조직적 사기를 의심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3일 정씨 사건을 경찰에 의뢰했다. 현재 서울경찰청이 수사 중이다. 빌라·오피스텔 1139채를 무자본으로 사들인 후 지난해 10월 사망한 원조 빌라왕 김모씨에 대해서는 서울경찰청이 건축주, 분양대행업자 등 5명을 입건해 조사 중이다.



김정민.최서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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