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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칼럼] 더 많이 빌려 더 많이 쓰다

미국의 정부부채 규모가 한도에 거의 근접했다. 부채한도가 증액되지 않으면 정부는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게 된다. 물론 재무부가 긴급조치를 발동해 저축계정기금 등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고, 보유하고 있는 현금으로 긴요한 지출을 계속할 수 있으므로 당장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실현될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1조 달러짜리 동전을 주조해 부채를 갚을 수도 있으므로 미국이 파산에 이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제금융시장도 부채한도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궁극적으로 부채한도가 증액되리라는 기대가 크다. 부채한도 문제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으로까지 이어졌던 2011년에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다양한 비관적 시나리오가 난무하였지만, 결국 양당은 부채한도를 증액하는 데 합의하였다. 미 국채 이자는 제때 지급되었고 원금은 예정대로 상환되었다. 부채한도는 거의 매년 문제가 되었지만 미국이 실제로 파산에 이른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이번 정부 부채한도 증액 과정은 지난번보다는 좀 시끄러울 것 같다. 부채한도 증액을 위해서는 하원과 상원의 합의가 필요한데,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하원의 다수당이 공화당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에 비해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공화당은 부채한도 증액을 대가로 지출 삭감을 요구하고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반대해온 공화당이 부채한도 증액을 대가로 동 법안의 축소를 요구하면서 양당 간의 갈등이 커질 가능성도 제기한다.
 
부채한도 협상이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부채한도가 증액될 때까지 미국 정부의 대응은 통화정책 및 단기자금시장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채한도 도달로 국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빌리지 못한 재무부가 연방준비제도에 예치된 현금을 인출하면, 민간에는 그만큼 추가적인 유동성이 공급된다. 이는 양적긴축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연방준비제도의 정책 효과를 의도치 않게 상쇄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부채한도 증액 이후에는 이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재무부가 연방준비제도 예치금을 다시 쌓기 위해 미국채 발행을 늘림에 따라 민간부문의 유동성이 흡수된다. 이 경우 단기금리가 일시적으로 급등하면서 단기자금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심할 경우 2019년 9월과 같이 단기금리가 정책금리 수준을 상회하는 일이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복잡한 일들을 겪지 않으려면 의회에서 빨리 합의해서 부채한도를 증액해야 한다. 더 나아가 주기적으로 증액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채한도를 충분히 늘려놓거나 부채한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도 좋아 보인다. 어째서인지 악마의 꼬임에 말려든 기분이다. 미국이 부채가 저렇게 많으니 덜 쓰게 하고 덜 빌려가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많이 빌려서 더 많이 써주기를 바라고 있다. 결말을 알고 있는 연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더 많이 빌려서 더 많이 쓰겠다는 뻔한 결론에 도달할 테니 재미없고 진부한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조금 앞당겨서 연극을 마쳐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태현 / 뉴욕사무소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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