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보내지 않은 편지
오늘 아침 눈을 뜨니 창밖에 눈이 살포시 쌓였다. 쌓였다기보다는 살짝 대지를 하얀 무명천으로 덮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겨울이라는 느낌이 포근하게 부딛혀왔다. 늦가을이 겨울의 소매를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와중에도 눈이 내렸다. 겨울을 지나지 않고서는 봄은 올 수 없다. 인생의 봄도 깊은 고난의 겨울을 지나서 온다.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암울했던 그 시기에 시인은 봄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 봄은 꽃이었고 희망이었다. 누구도 찬탈 할 수 없는 나만의 자유였다.
겨울은 봄으로 이어지는 건널목이란 생각이 든다. 건널목에 설치 된 신호등엔 건너 갈 수 없다는 빨간 신호가 켜져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건너편 길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도, 파란 불이 켜지고 차들이 정지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생의 날들은 내 마음과 달리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때가 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한데, 눈을 감으면 보일 듯 한데, 걸어가면 바로 닿을 듯한데 멈춰서야 할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접어야 할 때도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때론 사람의 일보다 자연을 보며 지혜를 얻을 때가 많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지만 자연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 때 내가 그 자리에 서 있길 잘했다고 나를 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다 매년 눈에 다가오는 오나먼트가 하나 있다. 화려한 장식을 한 값 비싼 오나먼트보다 더 소중한 이유는 그 속에 나의 웃음과 아들의 행복한 미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들의 어릴 적 사진을 작은 나무로 엮어 만든 30년이 넘는 오나먼트다. 사진 속 아들은 웃고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영락 없는 개구장이 모습이다. 너에게도 한때 이런 모습, 이런 시간이 있었구나. 유독 에너지가 많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 놀던 모습이 생생하다.
긴 시간이 흘러갔지만 기억은 흘러가지 않았다. 30년이 넘는 시간의 간극을 두고도 바로 어제 같은 기억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살다 보면 즐거웠던 추억도 있었을 것이고, 힘들고 아팠던 기억 하고 싶지 않은 추억도 있을 것이다. 견디기 힘들어 밤을 설치도록 가슴 져몃던 일들도 있을 것이리라.
하얗게 덮힌 눈 속에서도 가지마다 움을 트려고 몸을 뒤척이는 나목이 되자.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는 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이 보이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한 그루의 나목처럼 살아가자. 버리면 얻는 것이고, 낮아지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겨울나무가 찬바람에 울었던 것처럼, 속으로 속으로 뿌리내리며 우리도 울자.
눈 덮힌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쓴다
썼다 지워버린 편지를 다시 쓴다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가슴으로 쓰고 있다
눈이 녹고 봄이 오면 그때도 편지를 쓸 수 있을까
연두의 잎눈이 보석처럼 어리울 때
목련이 긴 목을 내리고 슬피 나를 바라볼 때에도
나 그대 앞에 엎드려 목놓아 울 수 있을까
나목들의 뜨거운 호흡으로 겨울 숲은 잠드는데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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