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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부재중 51통’의 공포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하루 수십,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와도 받지만 않으면 스토킹이 아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벨소리만 울리고 ‘부재중 전화’ 표시가 뜨는 것은 스토킹이 아니라는 잇단 법원 판결이 논란을 낳고 있다. 스토킹 처벌법 시행 1년, 아직도 법원은 스토킹 범죄에 무심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기계적 법 해석에 집착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화가 반복적으로 걸려와도 받지 않으면 스토킹이 아니라는 법원 판결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 특정 내용과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사진 unsplash]
최근 인천지법은 전 남자친구에게 나흘간 51차례 전화를 걸어 스토킹 혐의로 기소된 1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루에만 39번 전화하기도 했다. 법원은 “반복된 전화기의 벨소리로 상대방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했더라도, 상대방 전화기에서 울리는 벨소리는 정보통신망을 통해 송신된 음향이 아니”라며 “법 위반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나 발신번호가 표시됐더라도 이는 휴대전화 자체 기능에서 나오는 표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벨소리나 부재중 전화 표시는 내 폰의 기능이라, 타인의 가해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현행 스토킹법상 범죄 요건인 ‘물리적 접근, 직접적 도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인천지법은 지난달에도 비슷한 판결을 했다. 피해자 집 100m 이내 접근금지, 휴대전화 연락금지 등 법원의 잠정조치를 어긴 50대 남성이 수십 차례 전화했지만 받지 않아서 무죄였다. 두 경우 모두 17년 전인 2005년 ‘휴대전화 벨소리를 송신된 음향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여성신문에 따르면 법원이 유사한 논리로 무죄 판결을 한 경우가 올해에만 최소 3건이 더 있었다. 전화 스토킹을 처벌받게 하고 싶으면 피해자가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다. 스토킹법이 없던 시기의 오래된 판례를 끌어온 인천지법의 지난달 판결에 대해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스토킹 처벌법의 입법 목적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법 기술적으로만 해석해 피해의 맥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 “스토킹 정의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해 실제 일어나는 스토킹 행위를 포괄하지 못하는 현행법 개정”도 함께 촉구했다. 전화는 아니지만 문자 메시지의 경우 읽지 않았더라도 반복적으로 보내 불안과 공포를 줬다며 발신자를 처벌한 사례(2018년)가 있다. 피해자가 수신 거부 같은 적절한 응대로 스토킹이 미수에 그친 경우, 스토킹법에 별도 처벌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여성의전화는 “사법기관은 과거 판례에만 매달려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성인지적 관점을 바탕으로 상식적인 판결을 하라”고 논평했다.
스토킹법은 지난달로 시행 1년을 맞았다. 1999년 처음 발의됐으나 매번 미뤄지다가 22년 만에 이뤄진 법이었다. 제정 당시에도 ‘반의사불벌죄’ 조항이나 솜방망이 처벌 등 우려가 컸다. 결국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법의 맹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반의사불벌죄 조항 삭제, 온라인 스토킹 처벌 등 법 개정 요구 여론이 치솟았다. 당시 관련 간담회에서 송란희 여성의전화 대표는 “법 제도 정비도 중요하지만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 있는 법 제도마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지금 같은 상황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법 시행 이후 올 9월까지 스토킹 신고는 총 2만9156건. 하루 평균 85.7건 범죄 신고가 이뤄졌다. 스토킹은 단순한 괴롭힘을 넘어 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전조 범죄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법무부는 지난달 스토킹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지만, 스토킹 정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반영되지 못했다.
한편 인천지법은 22일, 유사한 ‘반복된 부재중 전화 스토킹’ 사건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모처럼 국민 법 감정에 발 맞춘 판결이라 다행이다 싶다가도 마냥 박수칠 일은 아니다.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판사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면 그건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성희(yang.sung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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