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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감격한다"…448년 된 가게서 만난 '향 전도사' [백년가게]

김현예의 백년가게
시간의 힘, 믿으십니까. 백년을 목표로 달려가는 가게, 혹은 이미 백년을 넘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쌓은 곳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요. 일본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백년가게’를 찾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신은 물론 귀신까지 감격하게 하며, 마음이 청정해진다. 잠을 깨워주고, 마음이 안정된다. 많이 피워도 싫증 나질 않고, 조금 즐겨도 금방 풍족감을 느낄 수 있다. 오래 두어도 썩지 않으며, 늘 사용해도 영원히 싫지 않다.’

향(香) 얘기다. 무려 송나라 때 풍류를 읊던 시인에게도 향은 무한한 즐거움을 안긴 모양이다. ‘황산곡’으로도 불리던 시인 황정견(1045~1105)이 남긴 ‘향십덕(香十徳)’은 향을 위한 더 없는 찬사다. 이 1100여년 전 글귀 앞에 정좌하고 고요히, 향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음미하는 이가 있다. 이나사카 요시히로(稲坂良弘·81) 전 고주(香十) 대표다. 올해로 448년째를 맞은 고주에서 지난 7일 그를 만났다.

일본에서 '향 전도사'로 불리는 극작가 출신의 이나사카 요시히로가 지난 7일 도쿄 긴자에 있는 고주에서 송나라 시인 황정견이 쓴 향십덕(香十徳)을 설명하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향은 듣는(聞) 것이다
고주는 1575년 교토(京都)에서 생겨났다. 8대가 에도(江戶)시대에 많은 향을 만들며 ‘명인’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일본 도쿄(東京) 긴자(銀座)에 본점을 두고 있다. 고주의 건물 3층으로 올라가니 일본식 바닥인 다다미(疊)가 깔린 빈 공간 한가운데 황정견의 글이 걸려있다. 그 앞에 선 이나사카가 손바닥 크기만 한 향로 하나를 들고 인사를 했다.

“이 안에 불씨가 들어있어요. 불씨 위에 재를 덮고 모양을 잡아놨고요. 그 위에 2㎜ 크기로 작게 자른 향목(香木)을 얹어요. 태우는 게 아니라 향목을 따뜻하게 하는 건데, 따뜻하게 하는 것만으로 향이 올라옵니다. 이 향을 깊은 호흡으로 음미해요.”

이나사카 요시히로 씨가 지난 7일 도쿄 긴자에 있는 고주에서 향도를 설명하면서 향을 '듣는' 법을 시연하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향을 음미하는 방법에도 순서가 있다. 우선, 왼손에 향로를 올린다. 엄지를 빼고 오른손 네 손가락으로 덮개를 만들 듯 향로 위에 살포시 얹는다. 향로를 얼굴 가까이 가져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살짝 열고, 반달 모양 틈을 만든다. 오른쪽 코로 심호흡하며 향을 한 번 들이마시고, 향을 느낀다. 그리고 또 한 번 천천히 왼쪽 코로 다시 깊게 들이마신다.

이나사카는 이를 두고 ‘문향(聞香)’이라고 설명했다. “향기가 내 마음에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지를 마주하는 것”이 문향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이 인간의 마음에 전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이 진짜 향을 즐기는 방식이란 얘기다.

“향을 맡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느껴요. 백인백양(百人百様)인데, 어떤 이는 어린 시절 맡았던 엄마의 향기를, 어떤 이는 벚꽃이 만개한 풍경을 떠올려요. 또 어떤 사람은 장미를, 가을 국화를 느끼기도 하고요. 후각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를 뇌에서 다르게 표현하는 건데,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린 그런 게 아닙니다. 물성(物性)을 정신의 영역으로 가져왔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향은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극작가에서 향 전도사로…향이 바꾼 인생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고주에선 다양한 향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그에겐 ‘향 전도사’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극작가로 활동하던 그에게 1982년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유엔(UN)에서 일본 문화 중 하나인 향도(香道)를 소개해달란 거였다. 90분의 시간과 400명의 관객. 보이지 않는 향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나 꽃꽂이를 하는 화도(華道)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향은 달랐다. 실제로 종가(宗家)에서 향을 즐기는 모습을 무대 위에 올리면서 향로를 객석으로 돌려 관객이 눈으로 보면서 후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했다. 그가 짜낸 무대는 큰 호평을 받았다. 일본의 향도에 관심이 깊은 미국 대학의 교수들이 그에게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 인생의 스위치가 바뀌었다”고 했다. 향을 알리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겨났다. 향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겐지 이야기(源氏物語)를 원문으로 읽기 시작했다. (※겐지 이야기는 일본의 대표 장편 문학 소설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11세기 초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는 여성 작가가 썼는데, 귀족 남성의 일대기를 다뤘다.)

그는 “1000년도 전인 당시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데 향기에 대한 표현만을 봐도 등장인물의 심정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이야기를 이었다. 옛 그림에서도 어떤 방식으로 향을 즐겼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향이 은은하게 스미도록 하거나, 옷깃이나 머리카락에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향을 스미게 하는 방법이 귀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했다.
이나사카는 이렇게 향에 빠져든 것을 계기로, 오랜 역사를 가진 고주의 대표까지 됐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공부를 지난 2011년 『향과 일본인』이란 이름의 책으로 냈는데, 순식간에 팔려나갈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향 전도사'란 별명까지 얻어 지금껏 향의 길을 걷고 있다.
440년이 넘은 향집 고주에는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젊은 손님들의 발길이 늘었다. 입문용 향부터 값비싼 제품까지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중국에서 백제, 그리고 일본…불교에서 시작한 향의 문화
40여년 향에 빠져있는 그는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 마치 강연을 한 편 듣는 듯한 인상마저 들 정도였는데,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불교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에 불을 붙여서 피웠더니 신기한 향이 올라와서, 깜짝 놀란 사람들이 조정에 이를 알렸다고 해요. 이 향목을 알아본 게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의 쇼토쿠(聖德)태자였어요.”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불교 문화를 계기로 향이 전해졌고, 시간을 거치며 귀족들이 '자신만의 향'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일본만의 향도로 안착했다는 설명도 보탰다. “그래서 옛 일본의 사랑 이야기에 항상 향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편지에 항상 자신의 향이 나도록 해서 보냈거든요. 불교 세계에 존재하던 향을, 사람들이 생활 속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거예요. 150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오면서 일본인은 향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된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향의 힘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고주 외관. 김현예 도쿄 특파원
자리를 옮겨 건물 지하에 있는 향 가게로 향했다.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럽고 따뜻한 향이 코끝을 스쳐왔다. 향목이다. 침향(沈香)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가라(伽羅), 백단(흰 꽃을 피우는 박달나무), 화향목(和香木), 전나무, 노송나무…. 여기에 계피며 클로브, 유향 등 다양한 향을 섞어 향을 만든다. 백단의 종류만도 6개에 달하는데 매장 직원은 이곳에 있는 향의 종류만 어림짐작 300여 종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이나사카는 “향은 지금도 발전 중인 문화”라며 다양한 향을 소개했다. 고주는 옛 일본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가루 향의 형태나 나무 목재나 원료를 조합해 향 주머니를 만들 거나, 문향을 집에서 할 수 있도록 간이 제품도 구비하고 있다. 옛 방식으로 향료를 꿀 등에 섞어 환 형태로 만든 것부터 상(喪) 때 쓰이는 향까지 다양하다. 옷에 넣어 향이 스미도록 하거나 책이나 명함 등과 함께 두고 향이 배도록 하는 것도 있다. 요즘 젊은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춰 1000엔(약 957원)이 안 되는 것도 입문 제품도 있지만 22만엔(약 210만원)이 넘는 초고가의 향도 판매한다. 한 통에 40개가 들었으니 개당 5500엔(약 5만2700원)쯤 하는 셈이다.
옛 귀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향을 조합해 '나만의 향'이 담긴 작은 향 주머니를 만들 수 있다. 만든 향주머니는 옷이나 서랍 등 원하는 곳에 두고 쓸 수 있다. 김현예 도쿄 특파원

향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속했던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80대에도 불구하고 향도를 알리는 이나사카에게 향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봤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했다.

“향은 눈엔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해요. 돈이 많기만 하면, 배가 부르기만 하면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요? 작은 향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이제는 절판돼 전자책으로나 볼 수 있다며 그가 선물로 건넨『향과 일본인』을 펼쳐 들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윽한 향이 풍겼다. 이나사카의 향이었다.







김현예(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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