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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노예 해방됐어도 인종차별은 1960년대까지 남아

미국 남북전쟁, 남부 변명은?
김기협 역사학자
노예제도는 문명의 발생과 함께 나타났다. 생산력 증가에 따른 사회 분화의 일환이었다. 고대문명이 번영한 곳마다 노예제도가 운영되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로마의 경우다.

로마제국의 노예제는 동로마제국에서 계속되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노예제가 시행되었다. 7세기 이후 이슬람권의 노예제도는 두 제국의 유산을 아우른 것이었다.

노예제 전통이 미약했던 서유럽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 기독교권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으나 동방에 비해 그 역할이 작았다. 로마제국의 고전문명이 서유럽 지역에 잘 전승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었다. 동로마제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서유럽은 사회분화가 부진한 단계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링컨 당선에 남부 7개주 연방탈퇴
전쟁 후에도 ‘빼앗긴 정의’에 집착

공화당 부패가 반동 분위기 조장
‘옛날 남부’ 그리며 흑인에 화풀이

노예해방 의미도 구호에 그친 꼴
전쟁서훈 1500여명 중 흑인 32명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미국 남북전쟁의 한 광경. 남부연합의 깃발이 보인다. 근대적 살상무기가 대거 동원된 최초의 ‘산업화된 전쟁’이었다. [사진 유튜브 캡처]
프랑스에서는 루이 10세가 노예제 금지령(1315)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재정 확충을 위해 농노가 속전(贖錢)을 내고 자유민이 되도록 한 것인데, 노예제가 부각된 후세에는 노예에게 적용되었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는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이 제도에 따라 프랑스인이 되고, 최초의 흑인 군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1315년의 금지령이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도 노예제가 법제화되어 있지 않았다. 두 나라에 노예 비슷한 신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법률로 뒷받침할 필요까지는 없는 사소한 요소였다. 18세기 후반 계몽사상의 유행과 함께 노예제 비판이 일어날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럽 내의 노예제 시행이 아니라 식민지와 관련된 노예무역이었다.

미국회의사당 장식에 남아 있는 제임스 오글소프의 모습. 조지아주를 세운 오글소프는 ‘노예 없는 식민지’를 표방하며 원주민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15세기에 유럽인은 마데이라·아조레스 등 아열대지역 섬들을 점령한 후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대거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발견 후 카리브지역으로 플랜테이션이 확장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북아메리카 본토에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제는 이슬람권에서 널리 시행돼 온 노예제와 달랐다. 이슬람권에서 노예의 역할은 가사노동에서 군대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노예와 일반인의 접촉면이 넓었는데 16세기 이후 플랜테이션과 광산 등 집단노동에 동원된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들은 일반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사회와 격리된 위치 때문에 노예를 ‘인간 아닌 존재’로 보는 경향이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예의 실제 모습은 사회마다 달랐다. 본국에 비해 식민지 노예제는 억압이 강했다. 식민지라도 프랑스령 퀘벡이나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억압이 덜했던 것은 집단노동의 비중이 영국령 아메리카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령 아메리카 내에서도 플랜테이션이 적은 북부 식민지 주민들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남부와 달랐다.

‘노예 없는 식민지’로 출발한 조지아

북군은 1863년부터 해방노예 모병에 나섰다. 종전 당시 병력의 10분의 1에 이르렀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임스 오글소프(1696~1785)의 ‘조지아 실험(Georgia Experiment)’이 노예제를 둘러싼 영국 본국과 식민지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준다. 조지아는 미국 13주가 될 식민지 중 가장 늦게(1732) 남쪽 끝에 설치된 식민지였다. 박애주의자로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오글소프는 캐롤라이나 남쪽에 ‘노예 없는 식민지’를 만들 것을 국왕에게 청원해서 인가를 받았다.

이 청원이 인가를 받은 것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와의 사이에 완충지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플로리다에도 노예제가 있었으나 기독교에 입교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 쉽게 자유민으로 풀어주는 개방적 운영이었다. 스페인과 사이에 긴장이 일어날 때마다 노예들에 대한 스페인 측 선동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이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조지아에 바란 것이다.

1790년과 1860년의 미국 노예 분포도. 점 하나가 노예 200명을 나타낸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글소프는 채무죄인(dept prisoners) 등 본국의 빈민을 데려와 소규모 자영농으로 재활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래서 노예 소유를 금지하고 한 가구에 50에이커(약 6만 평) 한도의 땅을 나눠주는 정책을 취했다. 노예 소유와 함께 음주를 금지한 데서도 ‘조지아 실험’의 도덕주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자영농을 바라보는 빈민만으로는 플로리다 방면의 위협에 대응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명 이하의 노예를 데려오는 이주민에게 500에이커까지 땅을 제공하는 타협적 방식을 병행하게 되었다. 이 방식으로 합류한 노예제 농장주들은 조지아 실험 전복을 위해 본국 의회에 로비활동을 벌였다.

오글소프가 1743년 조지아를 떠나며 조지아 실험은 힘을 잃고, 조지아 노예 금지령은 1750년 영국 하원에서 폐기되었다. 1776년까지 조지아의 노예 인구비율은 다른 남부 식민지들과 비슷한 45%까지 늘어났다.

수세에 몰린 남부의 피해의식

미국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평등사상은 확장되고 있었고, 독립의 명분 또한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진했다. 독립은 노예제 지역인 남부와 비-노예제 지역인 북부의 합작으로 이뤄졌으나 독립 후의 정책 결정에서는 남북 간의 입장이 갈라졌다. 노예제 해소를 향한 시대적 조류 앞에서 남부는 수세에 처해 있었다.

영토 확장 때마다 남북 간의 입장 차이가 불거졌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과 1846~1848년 멕시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정치적 위기가 거듭되었다. ‘미주리 대타협’(1820)과 ‘1850 대타협’ 등 고식책으로 봉합해 나가다가 남북전쟁에 이르렀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사진 위키피디아]
1860년 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 여러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는 가운데 또 하나 ‘대타협’의 제안이 나왔다. 헌법 개정을 통해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보장하자는 취지였지만, 새 영토의 노예제 채택 범위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노예지역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의 고사(枯死)를 획책한다는 남부의 피해의식이 걸림돌이었다.

1861년 3월 링컨 취임 전에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있었다. 링컨 정부가 이에 대해 바로 적대행위를 취하지 않은 것은 15개 노예주 중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있던 8개 경계주(border states)를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4월 12일 전쟁이 터지자 경계주들은 4개씩 갈라져 남북으로 붙었다. 1863년 1월의 노예해방선언에서도 북부에 가담한 메릴랜드·델라웨어·켄터키·미주리의 노예제는 예외로 남겨졌다. (전쟁 후의 헌법개정으로 곧 사라질 예외였다.)

‘재건’ 명분, 노예제 금지에 반발

링컨에 반대한 남부연합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난 후 남부연합 지역은 ‘재건(Reconstruction)’이란 이름의 계엄통치에 들어갔다.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고 지방정치가 재개되자 노예제를 금지한 13차 수정헌법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남부를 휩쓸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각 주의 입법과 사법, 그리고 민간의 폭력으로 거부한 ‘짐 크라우(Jim Crow)’ 시대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남부의 반동적 분위기를 격화시킨 것은 공화당 정권의 정치실패였다. 극심한 부패로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선거에서 위기에 몰렸다. 개표가 끝나갈 시점에서 민주당 틸든 후보는 184인 선거인단을 확보해 놓고 1명만 더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재건’을 서둘러 끝내주는 대가로 의회에서 확정할 남은 20명을 모두 공화당 헤이즈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그래서 총투표에서 3% 뒤진 헤이즈가 선거인단투표에서 한 표 이기는 결과가 되었다.

공화당 정권의 타락은 전쟁의 명분까지 퇴색시켰다. 북부의 야욕만 부각되면서 남부에서는 ‘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깔린 ‘옛 남부(Old South)’에 대한 그리움은 끈질긴 흑백차별의 동력원이기도 했다.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이 편의적인 구호에 그친 사실은 흑인의 군사적 역할이 약소했던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긴박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입대는 많지 않아서 종전 때까지 북군에서 흑인 비율이 10분의 1에 그쳤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 통계도 이 전쟁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전쟁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남북전쟁 관련 서훈자 1500여 명 중 흑인은 불과 32명이었다. 여성은 단 1명이었다. 그나마 1917년에 취소되었던 메리 워커의 훈장이 1977년 회복되지 않았다면 미국 명예훈장은 지금까지도 ‘남성훈장’에 그치고 있을 것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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