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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요즘 세상에 그런 남편 있을까

어떤 TV예능 프로에 왕년의 유명 가수와 원로 배우가 함께 나왔다. 화제가 자꾸만 누가 죽고, 또 누구도 죽고…라는 식으로 이어지자 그중 한 명이 “죽었다는 얘기 그만해!” 라며 듣기 싫다고 짜증을 냈다. 그 기분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이 때문인지 나도 요즘 사방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얼마 전에도 내 친한 친구 하나가 저세상으로 떠났다. 친구의 남편이 나에게 장례식에서 친구에 대해 조사(弔辭)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이 먹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내 친구와 남편의 경우는 특별한 사연이 있기에 조사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기를.
 
그레이스 김, 김경자는 참 좋은 저의 친구였습니다.  믿음도 좋고 인품도 좋은 친구였어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친구들을 보살펴서 많은 친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레이스를 처음 만난 때는 대학에 입학해서였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이름은 강경자였습니다. 그녀는 가나다순으로 적힌 출석부 첫머리에 이름이 올랐고 저는 ’홍‘가라서 맨 뒤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첫인상은 순정만화에 나오는 소녀처럼 아름답고 풋풋해서 멀리서도 눈에 확 뜨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레이스는 좀처럼 입사하기 힘든 호남정유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돌아온 분과 운명적인 만남으로 결혼까지 했습니다. 지금의 남편이십니다. 그 후 우리는 각자의 생활 영역으로 갈라져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십여 년 후 남편 따라 LA에 오게 되자 여기서 그녀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코스모스처럼 여릿여릿 가냘팠던 그녀의 모습이 당뇨로 좀 불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친자매 못지않게 자주 만나고 어울렸습니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점심도 사 먹고, 성경공부도 같이하고 매주 한 번씩 친구들과 산에도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미국 와서 그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커서 친구라기보다 저를 보살펴 주는 보호자 같았습니다. 특히 제 남편이 회사 일로 귀국한 뒤 저 혼자 아이들과 남아 있을 때는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게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챙겨 주고 외롭지 않게 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때는, 그레이스가 아들 둘을 훌륭히 키워 명문대를 나와 당당한 사회인들이 됐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이후로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때였습니다.  은퇴 후 골프를 너무 좋아하는 그레이스 네가 골프 회원권이 있는 벤투라로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그레이스가 그곳에서 골프만 치며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 청천벽력입니까?  그레이스가 아직도 팔팔한 60대 초에 당뇨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첨단 의술이 발달한 미국에서 당뇨로 시력을 잃다니!  정말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레이스는 깊은 어둠에 싸이고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레이스의 남편께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자신의 삶과 꿈을 묻어 버리고 그레이스를 위한 희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레이스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눈이 되었습니다. 식사를 손수 준비해서 손으로 떠 입에 넣어 주고 궂은 뒤 처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레이스의 불운이 자신 탓이라고 되뇌며 가슴을 치며 속으로 우셨습니다.  
 
그러기를 17여년, 짧지 않은 인고의 세월을 오직 사랑의 힘으로 버텨 오셨습니다. 육신은 지치고 쇠약해졌으나 사랑의 힘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열녀가 있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주위에서 “그렇게 남편 사랑을 많이 받은 그레이스는 행복한 사람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레이스! 아니 경자야!
 
네가 떠나기 바로 전날. 뒤늦게 너를 찾았을 땐 너는 이미 의식이 약해졌고 말 한마디 할 수 없더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나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 핑계를 대며 자주 못 찾은 것이 통한으로 가슴을 친다. 그런데 경자야, 어느 시인의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고, ‘짧은 한잠’ 지나면 영원히 깨어난다‘는 말이 내게 위로가 된다.  그때 우리 고통 없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이제 너는 모든 걸 벗어버리고 떠나지만 너를 사랑하고 끝까지 돌봐 준 너의 남편은 홀로 남아 계신다. 남편의 야윈 어깨를 감싸 안고 “사랑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 작별을 하고 떠나가려무나, 하나님, 그레이스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 남은 이들을 위로해 주소서.’
 
장례식이 끝나고 유족들이 그곳에 온 조문객들과 인사를 할 때 보니 그 남편은 넋이 나간 듯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긴 세월, 헌신적으로 보살핀 아내를 떠나 보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을 친구의 남편을 보며 마음이 저렸다.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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