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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 루이 암스트롱과 시카고

박춘호

박춘호

재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뮤지션 중 한 명을 고르라면 아마도 대부분 루이 암스트롱을 떠올릴 것이다. 트럼펫을 불며 거친 음색으로 ‘What a wonderful world’를 노래하는 암스트롱의 모습은 여러 광고에도 쓰이면서 한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암스트롱이 재즈 뮤지션으로 성장하는데 시카고는 음악 도시로 큰 기여를 했다. 올해는 암스트롱이 고향을 떠나 시카고에 발을 디딘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다.  
 
암스트롱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1901년 루이스 다니엘 암스트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암스트롱의 유년기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빈민가 일용직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미성년자 미혼모였다. 아버지는 암스트롱이 어렸을 때 어머니 곁을 떠났고 암스트롱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않은 채 소년보호소에 들어갔다.  
 
그는 보호소에서 밴드 단원으로부터 기본 음악 교육을 받게 되며 전환점을 맞는다. 이후 뉴올리언스에서 재즈 음악으로 명성을 날리던 킹 올리버에게 제대로 된 음악을 배운다. 그리고 그의 멘토인 킹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오게 된다.  1922년 8월 8일이었다. 암스트롱이 뉴올리언스에서 떠나는 기차를 타고 시카고 센트럴 역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다.  
 
시카고로 오기 전 암스트롱은 미시시피강을 오고 가는 증기선에서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시카고는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서 유입되는 흑인 주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인구 증가가 빨랐고 제조업 일자리가 많았던 시카고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꿈꿨다. 기간으로 따지면 1910년부터 1930년대였다. 당시 암스트롱은 킹 올리버와 함께 디럭스 카페, 드림랜드 카페, 선셋, 엘리트 카페 등지를 돌며 재즈 음악을 연주했다. 킹 올리버의 크레올레 재즈 밴드는 링컨 가든이라는 곳에서 연주를 많이 했는데 현재 31가와 코티지 그로브에 위치했던 이 곳은 시카고에서 가장 큰 댄스 홀로 유명했다.  
 


암스트롱은 자서전을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객석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연주하게 해라'는 외침이 들렸다. 내 어릴 적 꿈이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고 적었다. 그렇게 암스트롱에게 시카고는 뮤지선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었다. 그는 당시에 대해 “1920년대 시카고에서 음악인들은 신과 같이 존경 받았던 때"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암스트롱은 서서히 청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킹 올리버의 밴드 단원 중 한 명에서 솔로 연주와 보컬도 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던 때였다. 음악 평론가들은 이 때를 평가하면서 암스트롱이 재즈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던 음악 장르인 재즈가 암스트롱을 통해 세세히 다듬어지고 표현하는 방식이 매끄러워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때 암스트롱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 큰 변화를 이끄는 사람을 만난다. 바로 나중에 결혼하는 릴 하딘이다. 두 사람은 지금도 남아 있는 44가 2층 벽돌집에서 함께 살았다. 맥코믹 플레이스 남쪽에 있으면서 흑인 뮤지션들이 밀집한 브론즈빌의 중심가였다. 하딘은 피아니스트이면서 재즈 작곡자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암스트롱보다 조금 일찍인 1918년 시카고로 이주했다.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이었던 하딘은 암스트롱이 밴드를 떠나 자신만의 음악을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자신도 재즈 곡을 다수 창작했는데 후에 링고 스타와 레이 찰스와 같은 유명 뮤지션들이 하딘의 곡을 부르기도 하면서 음악인으로 명성도 쌓을 수 있었다.  
 
1923년 암스트롱은 인디애나주 리츠몬드로 가 아거 게넷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녹음한다. 여전히 밴드 단원 중 한 명이었지만 이후 암스트롱은 솔로이스트로 각광받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뉴욕으로 이주해 음악 활동을 하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다.  
 
1925년에는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핫 파이브’와 ‘핫 세븐’ 음반을 발표한다. 시카고의 오케이 레코드와 함께였는데 이 레코드사는 1926년 콜롬비아 레코드에 팔리기 전까지 초기 재즈 음악과 R&B를 전문으로 하게 된다. 암스트롱이 시카고에서 녹음한 89개의 레코딩은 현대 재즈의 토대로 평가 받고 있다. 암스트롱을 재즈 뮤지션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로 이끈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무대로 순회연주를 다녔고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기도 했다. 단순히 재즈 음악만 한 것이 아니라 팝 뮤직까지도 영역을 넓혀 빌보드 순위에서는 비틀즈를 누르고 차트 정상에 오른다. 그래미상 최우수 남자 보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암스트롱은 그의 음악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로도 유명세를 탔다. 그가 항상 가슴에 꽂고 있었던 손수건이 그랬고 트럼펫을 연주하면서, 또 마이크 앞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러했다. 거친 음색과 함께 암스트롱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비판도 있었다. 흑인들의 고된 삶과 애환을 담은 재즈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무대에서 항상 웃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암스트롱이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암스트롱이 단순히 흑인들을 단순히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암스트롱은 웃었다.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100년 전 바람의 도시로 이주해 뮤지션으로 성장했던 암스트롱은 그렇게 시카고와 함께 기억된다.  
 
 

Nathan Park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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