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약] 왜 소비기한인가
시대가 바뀌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과감히 버리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멀쩡한 식품을 버려서는 안 된다. 연간 버려지는 식품 폐기량이 한국에서만 연간 548만톤이다. 축구장 100개 넓이 땅에 쌓으면 아파트 3층 높이에 달한다. 처리 비용만 매년 1조원이 넘게 든다. 국제연합 환경프로그램(UNEP)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10%가 먹지 않고 버리는 식품에서 나온다고 추산한다.본래 유통기한은 식품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아니다. 식품의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한이다. 식품의 품질변화 시점까지 걸리는 시간의 60~70%로 잡으면 유통기한이 된다. 어제까지 유통기한이었다고 오늘 바로 상하는 건 아니다. 부패 시점까지 아직 30~40%의 시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나면 바로 버려야 한다고 믿는 소비자가 많다. 2013년 한국식약처 조사에서 응답자 절반 이상이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폐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유통기한이 사용되기 시작한 1980년대는 이게 맞았다. 냉장해야 할 식품을 제대로 냉장 유통, 진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틀린다. 유통환경이 훨씬 좋아졌다.
사람이 생각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다. 유통기한 의미에 대해 길게 설명하기보다 표시법을 바꾸는 게 낫다. 그래서 내년 1월부터 소비기한을 쓴다. 소비기한은 품질변화 시점까지의 기간을 기준으로 80~90%가 되도록 정한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식품이 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소비기한이 지난 경우에는 상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집에서 담근 김장김치에 만든 날짜를 적어두고 120일이 지나면 버리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남이 만들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김치·젓갈·고추장과 같은 일부 발효식품·참치캔·꽁치캔 같은 통조림은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기한을 표시할 수 있다. (제조업체 선택으로 유통기한을 표시할 수도 있다.) 품질유지기한이 지나도 상한 게 아니라면 먹을 수 있다.
식품에 어떤 기한을 표시하든 절대적으로 음식이 상했는지 아닌지 알려줄 수는 없다. 보관 조건에 따라 음식의 상태가 달라진다. 햄버거가 10년째 썩지 않는다는 식의 뉴스가 가끔 들린다. 수분이 충분히 제거되면 미생물도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물에 적시면 며칠 내로 상할 게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소비기한이나 유통기한도 식품 보관 조건을 맞출 때만 통한다. 식품에 표시된 기한은 열어서 먹기 전 이야기다. 개봉 뒤에는 의미가 없다. 개봉 뒤 권장 조건에 맞게 보관하면 된다. 그렇다고 먹을까 말까 헷갈릴 필요는 없다. 사과나 귤 먹을 때와 같다. 맛·냄새·외양이 이상하면 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그렇게 버릴 일 없이 잘 보관해서 다 먹으면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더 좋은 일이다.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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