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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김정은, 하노이 충격 벗어났나... 올해 공개연설 8번 역대 최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이 많아졌다. 공개 연설 횟수는 물론 한국과 미국을 향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위협 수위도 높이고 있다. 통상 최고지도자의 언급은 ‘마지막 카드’로 통한다. 정책이 바뀌거나 상황의 반전, 협상 결과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빠져나갈 구멍, 즉 에러텀이다. 북한 역시 김여정이나 외무상·통일전선부장·대변인 등을 내세우곤 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은 이 마지막 카드를 수시로 꺼내 들고 있다. 제자리걸음인 북·미 협상과 윤석열 정부를 향한 압박 차원인지,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 건 최근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한반도가 요동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 앞에 다시 서는 김정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 7차 이틀째 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김 위원장의 첫 대중연설은 그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100회 생일이었던 2012년 4월 15일 열병식 때다. 당시 그는 “더는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을 포함해 김 위원장은 집권 첫해인 2012년 한 해 동안 모두 5차례 마이크 앞에 섰다. 이후 김 위원장의 공개연설은 7차 당 대회와 장거리 로켓(미사일) 발사에 박차를 가하던 2016년(5회)을 제외하곤 1년에 3차례(회의 기간 중 복수의 연설을 1회로 간주) 안팎 수준으로 말을 아꼈다.

공개활동 하노이 회담 이전 회복

최근 무더기 연설 핵심은 선제 핵 타격
중국 체면 세워주며 미국 압박 의도
“담대한” “불가역적” 표현 차용도

하지만 그는 지난해 7차례 공개 연설에 나선 데 이어 올해엔 22일까지 8번 등판했다. 이미 역대 최다를 넘어섰다. 북한이 전승절이라 부르는 정전협정체결일(7월 27일), 전국비상방역총화회의(8월 10일), 인민군 군의(軍醫)부문 전투원 접견(8월 18일), 최고인민회의(9월 8일) 등 최근 두 달 동안에는 무더기 연설에 나섰다. 다음 달 10일 당 창건기념일 등의 행사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개 연설 횟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동시에 김 위원장은 2019년 이후 축소했던 공개활동도 대거 늘려 ‘하노이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한 모양새다. 그는 집권 첫해인 2012년부터 2015년까지 4년 동안(1월 1일~9월 22일 기준) 매년 평균 109.8회 공개활동에 나섰다. 지도자에 오른 뒤 현장방문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주민들과 접촉면을 늘려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통일부는 2016년부터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2018년까지 3년 동안 김 위원장의 공개 활동 숫자를 96→72→81회(1월 1일~9월 22일)로 파악했다.

하지만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없이 끝난 2019년엔 이전 평균보다 50회 가까이 줄어든 60회에 그쳤다. 2020년엔 같은 기간 40회로 더 줄었다. 하노이 충격에 코로나19가 겹친 탓이다. 공개연설이 늘어난 지난해엔 68회로 보폭을 넓혔고, 올해는 2017년(72회)을 상회하는 73회다. 숫자만으로는 하노이 충격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다 정상수준으로 회복한 셈이다.

조급함인가, 미국에 대한 미련인가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핵무기 완성을 선언했던 2017년에도 핵위협 강도가 셌다. 그러나 당시 북한은 평창 겨울 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나섰다. 올해 초부터 핵실험 움직임을 보여온 북한은 지난 8일 최고인민회의(14기 7차) 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 정책에 대하여’를 채택했다. 서문과 핵무력의 사명, 구성, 사용 결정의 집행, 사용원칙, 사용조건, 동원태세, 유지 관리 등을 담은 11개조의 법령이다. 위협을 느끼면 핵으로 선제타격하겠다는 점도 명기했다. 2013년 최고인민회의 결정(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하여)에선 핵으로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만 보복하겠다고 했던 북한이다. 핵을 이용한 보복공격이 선제타격으로, 공격 대상은 ‘핵보유국’(2013년)에서 ‘핵보유국과 야합하는 비핵국가’로 넓혔다.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선제타격’ 개념이나 김 위원장이 지난 8일 시정연설에서 법령 채택을 두고 “담대한 정치적 결단”, “불가역적인 국가의 지위 확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담대한 구상)과 국제사회가 북한을 향해 던졌던 선제타격(작전계획 5015)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한의 비핵화 원칙(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을 모방한 어깃장일 수 있다.

북한은 왜 이 시점에 핵 무력 법제화를 들고 나왔을까. 중국은 다음 달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당 대회를 예정하고 있다. 중국은 대형 정치행사를 앞두고 북한이 핵실험으로 재를 뿌릴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고 한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은 북한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북한은 핵 무력의 법제화 카드, 즉 무력시위가 아닌 말(言) 시위를 통해 중국의 체면을 세우면서도 미국을 압박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북한이 핵 무력 관련 법령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이 아닌 ‘최고인민회의 법령’으로 채택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최고인민회의는 첫날(7일) 회의에서 사회주의농촌발전법과 원림녹화법을 채택했는데 두 가지 모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이다. 이에 비해 핵 무력 법령이 다소 무게가 떨어진다. 나아가 북한이 법령의 전문(全文)을 즉각 공개한 것도 이례적이다. 극도로 보안을 유지하는 전략무기와 관련한 내용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22일 북한 국방성은 “불법무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라는 것을 애초에 인정해본 적이 없다”면서도 “우리는 지난 시기 러시아에 무기나 탄약을 수출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 없다”는 담화를 냈다.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수출했고, 이는 대북제재 위반이라는 지난 6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의 언급에 대한 반박이다. 북한이 여전히 미국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 러시아 화물 열차 운행 움직임도

북한이 이르면 다음 주 중국과, 그리고 머지않은 시점에 러시아와 열차 운행을 재개할 것이란 얘기가 들린다. 대북제재와 국경봉쇄로 경제난이 심하다는 방증이다. 과거의 북한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침묵으로 일관했다. 스위스 유학파인 김 위원장은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여기면서도 미국과 관계 개선이 근본 문제 해결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을 거다. 미국에 선을 그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배수의 진을 치며 자주 등판하는 이유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무서운 법이다. 일부에서 북한의 비핵화 노력과 동시에 한국의 핵무장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미는 북한의 움직임에 맞서 미국의 전략자산을 적극 활용하려는 논의가 한창이다. 남과 북, 미국 모두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쓰는 꼴이다. 반면 북한이 흔들고 있는 핵 위협 카드가 우리 사회에 주는 충격은 이전보다 줄어든 분위기다. 김 위원장의 말 시위가 실제 핵실험으로, 전술핵 무기의 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핵 강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모습에서 핵이 만능의 보검이 될 수 없음을 북한이 깨달아야 한다.



정용수(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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