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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국의 진짜 문제는 정치 분열”

이정민 논설실장
김훈 소설 『하얼빈』의 ‘후기’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안중근의 가족과 문중이 겪은 박해와 굴욕, 이산의 이야기가 별도 기술돼 있다. 일부를 옮긴다.

부인 김아려는 안중근이 처형된 다음 해 장남이 죽자 상해로 갔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는데 관련 기록은 없다. 북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동생 안정근도 망명지 상해에서 사망했다. 둘째 동생 안공근은 1939년 중경에서 실종됐다. 사촌동생안명근은 무장 독립투쟁을 하다 검거돼 옥고를 치렀고, 1927년 지린성에서 죽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어머니 조마리아는 상해에서 사망했다.

안중근의 차남 준생과 장녀 현생은 일제가 꾸민 ‘박문사화해극’에 동원된다. 총독부 관리들과 박문사(이토를 기리는 사찰)를 참배·분향하고 이토 차남 이토 분키치를 만나 “사죄하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안중근 가문의 굴욕과 절멸은 대한제국 황족의 불운한 최후와 닿아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황족이 되고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도, 해방을 맞았으나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숨을 거둔 마지막 황세손 이구도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이란 점에선 다를 바 없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성공
세계 부러움 사는 대한민국 만들어
위기 대응과 갈등 조정 상실한 정치
정쟁·분열의 구한말 정치 연상케

100여년 전, 한국과 일본은 똑같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될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나 일본은 발빠르게 근대화에 올라탔고 그렇지 못한 한국은 식민지가 됐다. 운명을 가른 건, 정치의 수준과 질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연구한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교수는 『대변동』에서 하급 사무라이가 주도한 메이지 유신을 ‘외적 위협에 의해 발생한 국가적 위기에서 다른 국가들을 본보기로 활용한 성공사례’로 평가했다. 흔히 메이지 유신을 천황을 정점으로 위로부터 일사불란하게 수직 집행된 관변 개혁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다르다. 쇄국 대 개항, 친 막부 대 반 막부세력간의 내전과 특권을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폭동, 농민 반란 등 3중, 4중의 갈등과 대결이 얽히고설켜 수년간 아수라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적대로 메이지 유신을 이끈 지도자들은 “현재의 반대자만 아니라 잠재적 반대자까지 매수하거나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며 내전을 수습하고 강국을 세웠다. 통합을 이끌어낸 정치력에 열쇠가 있었다. 대의를 위해 작은 차이를 유보할 줄 아는 절제력은 위기를 우회하지 않는 담대함과 강고한 애국심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2년 대한민국은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다. 요즘 일본 언론엔 ‘한국이 일본 추월’ ‘GDP·임금·구매력 모두 한국에 역전’ 같은 기사가 심심찮게 보도된다. 영화 ‘기생충’ ‘미나리’의 아카데미 수상에 이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에미상 6관왕을 거머쥐었다. 빌보드의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정상에 오르며 한류 바람을 일으킨 방탄소년단(BTS) 신화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또 10대 방산수출국이다.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전투기 등 한국산 무기는 폴란드·호주·인도네시아·노르웨이·영국 등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가고 있는데, 조만간 중국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 수립이후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의 열정과 헌신이 만들어낸 자랑스런 결실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어떤가. 한때 3류, 4류정치 논란이 일었지만, 지금은 아예 구한말 수준으로 퇴행한 것 아닌가 싶다. 집권당이라는 국민의힘은 자기 과시와 기행을 일삼는 30대 젊은 대표 하나를 포용하지 못하고, 비대위를 만들었다 허물고 법원과 신경전을 벌이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민주당은 국회 169석을 갖고도 뭣이 무서운지 2중, 3중의 철갑과 방탄 치기에 급급하다. 대선 전부터 비리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 된 인사를 당 대표로 뽑아놓고는 ‘정치 보복’ ‘야당 탄압’이라며 툭하면 검찰청·경찰청 찾아다니기 바쁘다. 탐욕과 권력 쟁탈의 촉수는 점점 발달하는데 미래 위기에 맞서는 담대함과 절제력은 잃어가고 있다.

갈등 이슈와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 출산율과 1위 자살률이란 통계만큼 나라의 생존과 흥망을 암울하게 하는 게 있을까. “지구상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 1위”(옥스퍼드대 데이비드 콜먼 교수)라든가 “집단자살사회”(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라는 외부의 경고음이 울린 지도 오래다. 나라 밖으로는 제국주의 망령의 그림자가, 안으로는 저출산·양극화의 부메랑이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와 애국심 넘치는 정치 리더십을 보기 힘들다. 그러니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정쟁과 집권 욕망에 불타 외국 군대까지 불러들였던 구한말 정치판이 자꾸 연상되는 것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애스모글루 MIT 교수는 며칠 전 “한국의 진짜 문제는 정치 분열”이라고 지적했다. 앗! 한국 정치의 무능과 타락을 세계가 다 간파해버린 것인가.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이정민(lee.j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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