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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민주주의 시대의 군주제…그 장엄한 ‘시대착오’

지난 19일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장례 행렬이 수병들과 15개 연방왕국의 군인들, 근위 보병·기병, 15세기 창설된 요먼 왕실경호대 요원 등의 호위를 받으며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버킹엄 궁으로 이어지는 더몰을 지나고 있다. 군악대가 베토벤·쇼팽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9일 치러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는 장엄했다. 전 세계에서 이를 지켜본 41억 명의 시청자는 영국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소프트파워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나흘간 일반 참배가 진행된 웨스트민스터홀은 14세기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윌리엄 월리스, 16세기 『유토피아』 저자인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 17세기 영국 군주 중 유일하게 처형된 찰스 1세의 재판이 열린 역사의 반면교사적 현장이다. 그 뒤 수많은 대관식·국장·연회가 열렸다. 웨스트민스터홀이 속한 웨스트민스트궁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꽃피운 현장이다.

궁의 측면에는 찰스 1세를 제거하고 1653~58년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공화정을 폈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이 서 있다. 그곳과 장례미사가 열린 웨스트민스터 사원 사이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즘·파시즘을 누르고, 종전 뒤 ‘철의 장막’이란 표현을 앞세워 소련의 팽창주의를 경계했던 윈스턴 처칠 총리의 동상이 있다.

15세기에 창설돼 알록달록한 고풍스러운 제복을 입는 요먼 왕실경호대 등이 여왕의 관을 내내 지켰다. 장례 행렬이 런던을 지나는 동안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실 군악대는 베토벤·쇼팽·멘델스존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했다. 역사와 전통, 품격, 문화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오랫동안 쌓인 소프트파워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눈에 띄는 것은 역사적으로 영국 통치를 받았던 ‘연방’(과거 영연방) 56개국 중 영국 군주를 자국 국가원수로 모시는 15개 연방왕국에서 파견된 군인들도 장례 행렬에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일부는 식민지 시대를 상징하는 단단한 흰색 모자인 피스 헬멧(사파리 헬멧이라고도 함)을 썼다. 역사의 명암을 상징하는 행렬이었다.

74세의 찰스 3세 신임 국왕과 그의 동생인 72세의 앤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은 대부분 군복 차림으로 긴 거리를 꼿꼿하게 발맞춰 행진했다. 행렬이 런던 화이트홀의 전몰자 위령탑인 ‘세너타프’를 지나자 국왕 찰스 3세와 그의 후계자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 윌리엄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례를 붙였다.

영국민 62% “군주제 지지” 하지만

통계 사이트인 스테이티스타가 지난 6월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 국민의 62%가 군주제를 지지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유고브의 올해 2분기 조사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이 인기도 75%(인지도 97%), 캐서린 미들턴 당시 왕세손비가 68%(93%), 윌리엄 왕세손 66%(96%), 앤 공주 53%(95%), 찰스 왕세자 42%(96%)를 각각 나타냈다.

‘시대착오적’이랄 수 있는 군주제가 이처럼 21세기에도 건재하는 바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로 이뤄진 영국이라는 국가 정체성 확립과 통합 유지에 왕족이 접합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찰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북아일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를 순방했다. 인구 6800만 명의 영국에서 스코틀랜드(545만), 웨일스(325만), 북아일랜드(185만) 주민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한 셈이다. 하지만 70년간 상징으로 활동했던 여왕이 떠난 지금, 영국 군주제가 여전히 국가통합과 정체성 확립, 그리고 공동체 자긍심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는 따져볼 일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영국 군주제는 도전을 받는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던 옛 제국주의·식민주의 시절의 폭력과 잔학행위에 대한 비난이 새롭게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2차대전 이후 국력이 쇠약해졌다. 왕실은 47년 인도 식민지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면서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유지하던 인도제국(1858~1947)의 황제 지위를 잃고 위상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말라야 식민지에선 게릴라들로 인한 비상사태(48~60)를, 케냐에선 마우마우단의 무장투쟁(52~60)을 각각 억누르며 독립을 지연시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국은 케냐에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학살·강간 등 잔학행위를 벌였으며 결국 독립 뒤 피해자에게 배상했다. 영국은 여왕 치세에 제국주의·식민주의를 대부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연방과 연방왕국의 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연방은 최근 영국 지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소말리아(포르투갈 지배)·르완다(독일→벨기에)가 가입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다양한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고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어서다. 앙숙인 인도와 파키스탄도 연방 소속이다.

문제는 연방왕국이다. 지난해 11월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바베이도스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연방에만 남았다. 영국 왕실의 권위를 빌려 국가적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목할 점은 영국이 미국·독일에 이은 세계 3위의 개발원조(ODA) 공여국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제 영국은 여왕 서거 이후 국제 질서 속에서 군주제와 21세기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를 새롭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위엄과 품위, 그리고 미소로 세계 각국을 방문하는 군주와 왕실이 언제까지 영국의 소프트파워를 대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재임 중 독립한 주요 국가
수단, 가나, 말레이시아, 소말릴란드, 키프로스, 나이지리아, 시에라리온, 쿠웨이트, 탕가니카, 자메이카, 우간다, 케냐, 몰타, 남예멘, 오만,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 짐바브웨, 브루나이



채인택(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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