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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디지털 시대에 더 빛나는 드로잉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드로잉을 간단히 표면에 ‘선을 그리는 행위’라 정의할 때, 이는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가 말해 주듯 인간의 가장 원초적 표현 행위이다. 드로잉은 역사적으로 회화적 묘사나 기록을 위해, 혹은 지침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건축 설계나 조각품 제작 시 작가의 사고를 시각화하기 위해 필수적 과정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드로잉은 그 미완의 속성으로 인해 서구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완성작을 위한 준비 작업 정도로만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드로잉이 한국에서 독립된 장르로 주목받은 것은 1970년대 다양한 매체 실험과 결합한 설치·행위·개념미술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4층 특별수장고를 개방해 53인의 예술가들이 연필과 펜, 먹과 수채를 사용해 제작한 드로잉 800여 점을 전시 중이다(8월 26일까지). 변관식·조평휘의 실경 스케치, 이중섭·박수근의 인물 데생,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의 드로잉북을 포함해 조각가 송영수, 건축가 문훈의 작업은 드로잉이 ‘기록과 재현’이라는 고전적 기능에서 출발해 어떻게 그 개념을 증폭시키며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회화·조각·건축 등 상상력의 원천
장르 경계 허무는 날것의 생생함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특별전
선과 선의 무한 확장성 돌아봐
원석연, 개미, 1976, 종이에 연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월북 서양화가 이쾌대의 ‘인체 도해서’는 한국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이던 작가가 제자 이주영에게 해부학을 가르치기 위해 연필로 몸 각 부분의 뼈와 근육을 상세히 도해하고 설명문까지 첨가한 일종의 해부학 지침서다. 4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은 인물화의 대가 이쾌대의 탐구적 작업 태도와 ‘관찰과 기록’이라는 드로잉의 전통적 기능을 잘 보여준다.

회화의 밑작업으로 폄하되던 연필화를 독립된 장르로 승격한 작품으로 원석연의 ‘개미’를 꼽을 수 있다. 평생 연필화만을 고집했던 작가는 “연필 선에는 일곱 가지 색깔이 있으며 그 안에는 소리와 리듬이 있고 생명과 시와 철학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우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려 낸, 다리가 끊겨 죽은 수십 마리의 개미는 격동기를 살아가는 약한 인간군상을 은유한다. 무채색 종이와 연필만을 사용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어떤 채색화보다 강한 미적 완결성을 보인다.

조각가의 드로잉은 화가와 달리 입체적 형태와 촉감까지 감안해 제작된다. 헨리 무어의 말처럼 조각가에게 드로잉이란 조각보다 빠르게 많은 조형 경험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자, 조각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작업이다.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대칭미를 통해 형상화한 추상 조각의 대가 문신이 남긴 150여 장의 드로잉은, 낙서와도 같은 끄적거림으로 시작된 아이디어가 마음속 형상화를 거쳐 조각 형태로 거듭나기까지의 조형적 탐험과 실험의 여정을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낱장의 드로잉이 책갈피 모양의 유리판과 철제 서랍장에 질서 있게 진열되어 관람자만이 아니라 연구자들을 위한 일목요연한 자료로 기능한다.

한편 건축가 정기용이 1996년부터 10년간 제작한 ‘무주 프로젝트 드로잉’은 그가 전북 무주에 세운 공공건물 30여 채의 드로잉이다. 흙을 가장 민주적인 재료로 여겨 흙벽을 사용한 진도리 마을회관, 자연을 담기 위해 건물 정문을 덕유산 방향으로 낸 안성 면민회관의 드로잉은 건축을 위한 설계도면이자, 사고의 발전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호와 숫자, 메모가 빼곡히 적힌 작업 노트이다. 사람의 삶과 자연의 삶을 이어주고자 했던 정기용의 건축 철학이 담긴 그의 ‘손’ 드로잉은 디지털 드로잉이 갖지 못하는 예술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1970년대가 되면 드로잉은 행위 예술과 결합한다. 전위예술의 기수 이건용이 자신의 몸을 도구 삼아 제작한 ‘신체 드로잉 76-2’는 “왜 작가는 화면을 마주 보고 그려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건용은 합판을 등 뒤에 세운 후, 매직을 손에 들고 무작위로 수백 번의 선을 그었다. 일견 합판 위의 낙서처럼 보이는 결과물은, 작가의 시각에 종속됐었던 기존의 드로잉과 달리 순수한 몸의 흔적을 드러낸다.

개념미술의 거장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은 드로잉의 특성을 ‘수단의 겸손함, 날것의 생생함, 미완, 열린 결말’로 정의한 바 있다.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아 어느 매체와도 잘 어우러지는 드로잉은, 회화·조각·사진 등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포스트 미디엄’ 시대에 오히려 빛을 발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아이디어로 충만한 작가의 정신과 그 정신의 확장인 손이 만들어낸 드로잉이 디지털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영감의 원형질로 작용하는 이유이다.

이주현 미술사학자,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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