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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의 시시각각] 공수(攻守) 뒤바뀐 한ㆍ일 관계

예영준 논설위원
고인이 된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일본 총리의 보도사진 가운데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2014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청중석 맨 앞자리에 앉아 박근혜 대통령(당시)의 주제연설을 경청하던 모습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취임 1년이 되도록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던 박 전 대통령에게 다가서기 위한 제스처였다. 박근혜-아베 첫 회담은 그로부터 두 달 뒤 한·미·일 3자 회담 형식을 빌려 이뤄졌고, 양자만의 회담은 3자 회담으로부터 또다시 1년8개월이 지난 뒤에야 성사됐다. 적어도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한국이 공세, 일본이 수세적 입장에 있었던 게 한·일 관계의 정형화된 패턴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 [AP=연합뉴스]

그 패턴이 깨지고 공수(攻守) 역전이 일어난 건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다. 일본은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니 한국이 먼저 문제를 풀어야 한·일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며 공세로 전환했다. 문재인 정부의 반일 죽창가는 높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정상 회담 성사에 매달렸다. 다자회의 리셉션장에서 먼저 다가서는 쪽은 늘 한국 대통령이었고, 가급적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본 총리가 멀찌감치 자리를 잡는 일도 있었다. 문 전 대통령은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 회담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 공을 들였으나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난주 일어난 작은 소동도 이런 공수 역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이번 주 뉴욕 유엔총회를 계기로 한 한·일 정상회담 개최에 일본이 ‘흔쾌히’ 응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신문들은 1면 기사로 33개월 만의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일본에서 즉각 반박 보도가 나왔다. 일본 신문들은 “아무것도 합의된 게 없다”는 외무성의 부인과 함께 두 정상의 만남이 이뤄질 경우 ‘30분씩 얼굴을 마주보는 회담’이 아니라 일어선 채 몇 마디 나누는 스탠딩 회담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정을 알 만한 일본 쪽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대답은 비슷했다.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아직 이르다는 의견이 다수다. 강제징용 해결책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험에 비춰볼 때 실제로 양국 정부 간에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마도 두 정상의 뉴욕 만남은 이뤄질 것이다. 남는 문제는 형식인데, 일본 언론이 말하는 스탠딩도 아니고 한국이 바라는 정식 회담도 아닌 중간의 것, 즉 외교가에서 풀 어사이드(pull aside)라 부르는 약식회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정식 회담 테이블에 양국 국기를 걸고 사전 조율된 의제를 놓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의전과 격식 없이 편하게 앉아 짧은 시간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이다. 그걸 놓고 한국 대통령실은 굳이 ‘회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고, 일본은 ‘회담’이 아닌 ‘회동’쯤으로 축소하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럴까. 정상회담에 대한 양국 간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한 일본 인사의 분석은 이렇다. “정상회담을 해결의 출발점으로 보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해결의 종착점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큼 확실한 해결의 가닥을 잡고 난 다음에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뉴욕타임스 회견에서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기만 하면 묵은 현안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국의 행동을 먼저 보겠다는 일본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일본의 완강함도 문제지만 조급해 보이는 한국의 자세도 걱정스럽다. 한국은 회담 성사에 매달리고 일본은 못 이기는 척하며 응하는 양상이라면 ‘밀당’의 결과는 한쪽으로 기울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회담 성사 자체를 요긴한 협상 카드로 일본의 손에 쥐여주는 결과를 자초하면 안 된다.



예영준(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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