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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의사의 책임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담대하고 선명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예일대 마틴 하글런드 교수의 역작 『내 인생의 인문학』에서는 책임의 속살이 기술된다. ‘자신 이외의 무엇인가에 속박된 사람만이 책임감을 가질 수 있다. 상실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누군가를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다. 절망의 위험 즉,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왜 자신의 행위가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책임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기준이다.

의학의 발전 속도는 실로 눈부시다. 난공불락이었던 고약한 질환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진단과 치료법이 개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극복되지 못하는 것은 환자와의 소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시선이 다르지 않은가. 프란츠 카프카는 단편 ‘시골의사’에서 ‘처방전을 쓰기는 쉬우나 환자와 소통하기는 어렵다’라는 명문을 남겼다. 오래전에도 현재에도 그렇다. 환자가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날이 갈수록 소통 불능인 현대 사회에서 환자의 질병뿐 아니라 아픈 마음도 어루만지며 소통하는 것은 모든 의사의 꿈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튼실하지 않다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 바탕은 의사로서의 궁극의 책임감이다. 그러나 어찌 이를 강제할 수 있을까 싶다.

상실의 의미를 이해하는 책임감
수세적 책임감은 소통 저해 야기
환자 기대와 불안은 책임감 원천
환자에 대한 존중이 신뢰 낳아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의사는 치료자로서 정체성을 갖는다. 그에 따른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은 당연한 요구다. 이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중의 기대이기도 하다. 투철한 직업윤리는 직업적 정체성에 대한 냉철한 자각에 기반한다. 환자의 수술 후 예후가 좋으면 의사의 일상은 평화롭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절로 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치료에도 신뢰의 균열에 직면한다면 의사로서 무기력함을 느낀다. 이윽고 환자의 치료에 대한 낙관보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의사의 책임은 광활하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불신도 감내해야 할 책임의 불가피한 영역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설명의 의무가 있다. 많은 의사들이 이 설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환자의 선택폭을 늘리기 위해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하고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에 어느 의사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지극히 합당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의 의무가 때때로 책임 공방에 차용되기도 한다. 처방된 약물의 예상되는 부작용이나, 수술 후 생길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설명의 의무는 신뢰 없는 도식적 절차로 평가절하되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처연한 일이다. 이럴 때 의사의 책임은 수세적이다. 그러나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환자에 대한 진정성을 공감에 이르게 하는 것도 책임의 또 다른 영역이다.

실제로 치료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 환자에게 정보를 주는 과정이 아닌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설명이 되어 버리는 순간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인다. 의사의 책임이라는 가치는 퇴색된다. 그러나 환자와 의사만의 관계로 국한된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는 많은 의사들에게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희망이 있을 때는 약속된 것의 가치를 믿고, 두려워할 때는 위협받는 것의 가치를 이해해줘야 한다. 지난한 문제이지만 한국 사회 의료계의 시급한 과제이다.

의사의 실존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직업으로서의, 소중히 여기는 것에 따라 진료의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다. 책임의식 강화는 결국, 의사는 누구이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해하기 위한 필연적 시간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동료 의사들이 있다면 환자로 인해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책임이 있기에 응당 감내해야 할 수련의 과정이 의사의 길이 아니겠는가.

의사의 책임은 선언이 아닌 실행으로 구현된다. 환자와의 소통도 대개 그렇게 이뤄진다. 돌이켜 보면 대학병원 수련 과정 속에서 비번 근무일 때에도 의사의 손이 바뀌는 것을 마냥 불안해하던 환자와 보호자의 눈빛은 소통의 간절함이었다. 환자와 가족의 기대와 불안은 책임의식의 원천이었다.

환자에 대한 의사로서의 직업적 책임의식을 확장하기엔 의료현실은 너무도 엄혹하다. 의사의 책임은 당위성의 강조나 명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픈 이들을 치료한다는 투철한 책임의식은 결국 환자에 대한 예의와 존중에서 나온다. 그럴 때 의사는 환자에게 신뢰받는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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