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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불편한 현실 수용법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나도 정신승리 좋아한다. 그 어느 곳보다도 집을 좋아하는 나에게, 정신승리는 적성에 맞다. 오늘도 침대 위에서 중얼거린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평양냉면의 명가 피양면옥이 제격이지. 그러나 가서 줄서기 귀찮군. 내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냉면 맛은 다 거기서 거기야. 이처럼 정신승리는 냉면 맛까지 바꾸어 버린다. 누워서 다 해결할 수 있다.

이래서 내가 여우를 미워할 수가 없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한 여우는 먹고 싶어 펄쩍펄쩍 뛰어보지만 소용없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입이 닿지 않는다. 결국 여우는 정신승리를 감행한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사람들은 여우를 비웃지만, 나는 여우에게 공감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하지 않고 진짜 포도를 따 먹으려면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고도의 트레이닝을 통해 점프력을 키워서 따먹거나, 다른 여우와 합작하여 나무를 기어올라 포도를 따 먹어야 한다. 둘 다 힘들다. 어느 세월에 트레이닝을 해서 몸짱이 되고, 어느 틈에 다른 여우를 섭외한단 말인가. 그에 비해 정신승리는 ‘가성비’가 좋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라는 정신승리를 통해 여우는 안정을 되찾는다.

가스라이팅 정신승리의 유혹에도
낙방·패배의 현실은 엄연히 존재
다양한 현실을 여러 관점서 보는
마음의 탄력얻는 게 진짜 정신승리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정신승리에 맛 들이면, 승리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내 정신은 패배를 모른다! 배가 고프다? 배가 부르다고 정신승리하면 된다. 칭찬에 굶주렸다? 환청으로 칭찬을 들어버리면 된다. 불행한 느낌이 엄습하는 것 같다? 모든 불행을 다 행복이라고 느끼게끔 자신을 길들이는 거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외로움도 물리칠 수 있다. 나 혼자 팬 미팅도 하고 나 혼자 팬클럽도 만들면 되니까. 이리하여 결국 그림의 떡만 보아도 배부른 경지에까지 이른다. 아무 데나 쏘아라. 과녁은 거기에 그리면 되니까.

죽을 때까지 정신적으로 연전연승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문제는 정신승리가 현실 승리는 아니라는 거다. 정신승리는 정신의 공갈 젖꼭지다. 여우의 문제는 제대로 승리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패배하지 못한 데 있다. 제대로 패배했다면, 점프력 강화 훈련으로 몸짱이 되었을 텐데. (정신으로) 승리했으므로 개선을 도모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현실이 결국 여우의 방문을 두드릴 거다. 이제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 나와서 청소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사회에 나가서 멀쩡한 사람처럼 굴어.

현실이 가하는 ‘팩트 폭력’은 실로 따끔하다. 한번 사는 인생, 원 없이 꿀 빨다 가고 싶다고, 해맑은 표정으로 벌집을 쑤셔 보라. 벌에 쏘여 만신창이가 될 거다. 현실의 벌침에 쏘여 신음하지 않으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벌의 습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벌을 피해 무난히 꿀을 채취할지 배워야 한다. 쾌락을 좇던 철학자 에피쿠로스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분명한 사실에 반대할 경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현실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협력대상을 찾아야 한다. 말이 좋다. 그게 그렇게 쉽겠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에 체력도 정신력도 부족하다. 게다가 타인은 종종 독침이 아니던가. 협력대상이라니, 아무 대가도 없이 누가 선선히 협력해준단 말인가. 정신승리가 아닌 현실승리는 너무 힘들다. 현실의 포도를 따먹기 위해 점프력 강화 훈련을 하다가 그만 우리 여우는 탈진한다.

탈진한 여우는 다시 한번 정신승리를 고려한다.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가스라이팅(현실 파악을 조작해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이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어려우므로, 대신 마음의 현실 인식을 조작하는 것이다. 세상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이, 수많은 상담가들이, 이른바 멘토들이 마음 수련 운운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저 넓은 세상을 어떻게 일거에 바꾼단 말인가? 그에 비해, 자기 마음은 어쩐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정신승리의 궁극은, 자신이 정신승리를 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잊는 것이다. 그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한 정신승리는 불완전한 승리다. 포도가 시다고 판정한 여우는 과연 자기가 정신승리 중이라는 사실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 있었을까. 혹시 정신승리 중이라는 사실이 여우의 뇌 한구석에서 계속 주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면 대안 현실이 필요하다.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도 자신의 상상을 믿어줄 때 대안 현실이 생겨난다. 다른 여우들도 저 포도가 시다고 생각해줄 때야 비로소 자기의 정신승리가 완성된다. 그래서 타인에게 다가가 가스라이팅을 시작한다. 정신승리의 객관화에 나서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머리는 가스실이 되고, 그의 입은 상대 마음을 식민화하는 가스 분무기가 된다. 난 언젠가 성공할 거거든. 날 사랑한다면 1억원만 빌려줘. 이 오빠(우웩!)만 믿어. 꽃길만 걷게 해줄께.

그런데 현실이란 인간 정신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인다. 누구의 관점과도 무관한 ‘순수한’ 현실은 없다. 타인, 권력자, 혹은 정부가 하는 가스라이팅의 희생물이 되지 않는 길은, 어디에도 없는 순수한 현실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도 여우의 관점이 아니라 포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볼까? 포도의 세계에서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근거 없이 시다는 평가를 일삼는 평가 권력의 폐해를 그린 작품일지도 모른다.

순수한 현실이라고 가장하면서 사람들에게 해대는 가스라이팅. 그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물리적 폭력이 통제되고 있는 정치 세계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모든 정신승리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귀여운 정신승리도 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라고 ‘셀프’ 가스라이팅을 시도한 에도 시대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도 있다. “반딧불 하나가/ 내 소매 위로 기어오른다/ 그래, 나는 풀잎이다.”

사태를 다른 관점에서 봐보라고 권유한다는 점에서, 선의의 위로는 어느 정도 가스라이팅을 닮았다. 친구가 큰 실패나 좌절을 겪고 있는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위기가 곧 기회라고 말해주어라. 친구의 마음이 좀 진정될 것이다. 친구가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실의에 빠져 있는가?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토지』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설득하라. 친구가 비싼 돈을 주고 산 티팬티가 야하다고 입기 망설이고 있는가? 티팬티가 섹시한 힙스터의 기저귀라고 생각해보라. 한결 과감하게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종류의 위로를 계속하는 것은 물론 한계가 있다. 시험에 낙방한 젊은이에게 노인이 전형적인 위로를 시전한다. “입맛이 쓰겠지만, 보약 먹은 셈 치게.” 그러나 9수를 거듭하는 수험생에게, 계속 “입맛이 쓰겠지만, 보약 먹은 셈 치게”라고 말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 수험생이 볼멘소리로 대꾸하지 않을까. 그놈의 보약 그만 좀 먹고 싶어요! 그리고 이거 보약 아니에요! 방금 실연한 청년에게 ‘세상에 여자 많아’라고 위로한들, 효과가 있을까. 한때 세상에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이가 세상의 뭇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낙방은 낙방. 실연은 실연. 패배는 패배.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인지와 납득은 다르다. 낙방·실연·패배를 인지했다고 해서 마음이 곧바로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선뜻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마음이 그 불편한 현실마저 수용해냈을 때 그것이 바로 정신승리다.

승리는 승리고, 패배는 패배다. 하나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패배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패배도 모든 면에서 패배인 것은 아니다. 모든 관점에서 다 패배인 경우는 없다. 어떤 패배를 해도 인생 전체가 패배로 변하는 경우는 없다. 현실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을 갖는 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 그 현실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국면을 드러낸다는 것, 이것을 알고 적절히 대처하며 살아가는 일은 말만큼 쉽지 않다. 천 년 전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평생의 숙제였던 것 같다. 중국 송나라 때 문인 소식(蘇軾)은 말한다. “평생 동안 도를 배운 것은 오직 외물의 변화에 대처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니, 뜻밖의 일이 닥치면 반드시 이치에 맞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平生學道, 專以待外物之變, 非意之來, 正須理遣耳.)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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