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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퍼스펙티브] ‘바이 아메리칸’에 위협받는 ‘메이드 인 코리아’

고래 싸움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무역협정 준수가 지구를 구하는 일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친 민주당 성향의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뉴욕시립대 교수)이 최근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칼럼의 한 대목이다. 칼럼 제목은 ‘세계는 덜 평평해지고 있다(The World Is Getting Less Flat)’. 세계화 흐름을 역설한 뉴욕타임스 기자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세계는 평평하다』(2005년 발간)를 살짝 비틀었다. 세계화 퇴조는 이미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 됐다는 게 칼럼 요지다.

크루그먼은 북미산 자동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옹호한다.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기후 대책 추진을 위해서 민주당으로선 미국 내 일자리 창출과 연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진단했다. 그 결과가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조항이라는 것이다.

미, 기후 대응 명분 보호무역주의
‘일자리 정치’ 몰두 탈세계화 행보

중, 반도체 빼고는 기술 턱밑 추격
막대한 흑자 내던 대중 무역 위기

한국 성장판인 국제분업 재편 중
결국 초격차 기술로 활로 뚫어야

북미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허용한 조치에 한국 정부와 기업이 당황하고 있다. 뒤늦게 대책을 찾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잘 띄지 않는다. 크루그먼의 지적처럼 ‘지구를 구하는 일’, 즉 기후 대응 명분과 결합한 IRA의 틀을 바꾸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의 정치성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IRA를 통해 미국이 노리는 것은 제조업의 자국 내재화다. 노골적 탈(脫)세계화 정책이다. 칼럼에서 크루그먼이 든 비유가 정곡을 찌른다. “영화 ‘스타트렉’에 등장하는 ‘만능합성기’가 있다면 홍차를 마시고 싶을 때 굳이 스리랑카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IRA는 말하자면 이런 ‘만능 합성기’를 미국 내에 설치하겠다는 의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보호무역주의 우려에도 법안을 밀어붙였다. 오는 11월 중간선거 때문이다. 기후 대응 등을 명분으로 지지층을 규합하려는 전략이다. 실제로 IRA 입법 성공과 낙태권 이슈 등이 맞물리며 민주당에 불리했던 선거 판세가 조금 변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입법 과정도 철저하게 정치적이었다. 실제 이 법안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 의회 예산국은 “법안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2022년에는 거의 없으며, 2023년에는 마이너스 0.1~0.1%포인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이라는 명칭이 무색할 지경이다. 공화당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것”이라며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에 서명한 뒤 펜을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기념으로 건네주고 있다. 석탄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웨스트버지니아주가 지역구인 맨친 의원은 끝까지 이 법안에 반대하다 마지막에 돌아섰다. [AP=연합]
그럼에도 바이든은 민주당 내 반대자 조 맨친 상원의원을 설득하면서 기어코 입법에 성공했다. 맨친 의원에게는 화석연료 산업에 끼치는 법안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보완책까지 약속했다. (맨친은 석탄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신이다)

바이오산업까지 미국으로

공정 무역 훼손, 동맹국의 반발 가능성, 화석연료와의 타협 같은 무리수를 감수하며 법안을 밀어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일자리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이후 트럼프를 거쳐 바이든 정부까지 변함없이 유지돼온 리쇼어링(생산기지 본국 회귀) 정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미국의 로비 단체인 ‘리쇼어링 이니셔티브’는 올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 효과로 미국에 35만 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리쇼어링으로 늘어난 미국 내 일자리는 2010년 6000개에 그쳤으나, 코로나 19가 터진 2020년에는 18만 개, 지난해엔 26만 개로 불어났다. 미 정부의 강력한 인센티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대만 위협 등 불안정한 국제 정세 등 때문에 생산시설을 미국으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기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도체·전기차 등에 대한 미국 내 투자 확대 조치를 관철한 바이든은 지난 12일에는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미래 산업인 생명공학 관련 물자 및 상품까지 미국에서 제조하라는 것이다. 의약품 위탁 생산을 확대하고 있는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으로선 또다시 선택의 갈림길에 설 가능성이 커졌다.

표정 관리하는 일본

이런 기조를 고려하면 인플레이션감축법의 틀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이 지난 5월 22일 오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환담을 가진 후 국내외 언론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정 회장은 모두 105억 달러의 미국 투자를 약속했다. [현대자동차그룹]
18일부터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에 나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이지만 성과를 낙관하기 힘들다. 불공정 무역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한 미 대통령의 정치적 결정을 경제나 외교 논리로 뒤집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의 중간 선거(11월 8일)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이 해당 대통령 임기 내에 크게 수정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우리 정부는 올해 말까지 미 재무부가 내놓을 IRA 시행령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 대한 예외 조항이 들어가는 방안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산층 노동자를 의식한 미국 의회 분위기, FTA 미체결 상태인 일본·EU·영국 등에 대한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가능성이 크다고는 할 수 없다.

일본 및 유럽 국가들과 공조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으나 이 역시 성과는 미지수다. 세부 입장이 달라 조율에 난항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은 한국만큼 급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이브리드에 치중하느라 전기차 전환이 늦은 일본으로선 보조금 지급 중단으로 발목 잡힌 현대차 처지가 은근히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지통신은 “일본 기업으로선 생산과 조달 등을 미국으로 신속하게 전환하기만 하면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중 ‘제조 내재화’에 멍드는 한국

상황이 이렇다 보니 2007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말한 ‘한국 경제 샌드위치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회장의 샌드위치론이 나올 때 우리 경제는 일본에는 첨단 기술에 뒤지고, 중국에는 저임금 노동 경쟁력에 쫓기고 있었다. 중국의 성장과 일본의 정체 속에서 샌드위치 위기론은 잦아드는 듯했다. 그러나 미·중이 주요 산업 내재화에 나서면서 한국은 차원이 다른 위기를 맞게 됐다. 한국 같은 중규모 개방경제에 기회로 작용했던 거대 국가 간 틈새가 위기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은 제조업 강국이다. 2020년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가 발표한 세계 제조업 경쟁력(CIP)에서 3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런 성장에는 미국과 중국의 역할이 컸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 체제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제공하는 저임금과 거대 시장을 이용해 발전했다. 1980년대 미국의 일본 반도체 견제가 도약의 발판이 됐고, 90년대부터는 대중 교역으로 무역 흑자를 키웠다.
미국 상무부의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 전략 보고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하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520억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미 상무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올 7월까지 거둔 한국이 거둔 대중 무역 흑자는 7099억 달러. 그러나 중국 산업의 고도화가 진전되면서 2013년 정점(628억 달러)을 기록했던 대중 무역 흑자는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올 5월부터는 수교 이후 처음으로 4개월 연속 적자를 냈다. 중국의 과도한 방역 조치와 도시 봉쇄 등의 영향이 있었다지만, 한번 바뀐 교역의 방향 자체를 돌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기회가 되려면

미국의 중국 견제가 한국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장비·기술을 규제하면 중국은 첨단 반도체에서 극복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회론의 전제는 중국에 대해 지킬 만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디스플레이·스마트폰·전기차·배터리 산업 등에서 중국에 대한 한국의 경쟁 우위는 사실상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만은 예외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한·중 반도체 기술 격차를 D램 5년, 낸드플래시 2년 정도로 추정했다. 턱밑까지 따라온 다른 산업보다는 아직 여유가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세계 최초로 GAA 기술을 적용한 3나노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초도 양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관련 주역들이 손가락으로 3을 가리키며 양산을 축하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미·중 신냉전 틈새에 낀 한국의 선택은 어렵다. 지금까지 기댔던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프레임도 흔들리게 됐다. 한국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고슴도치 가시 같은 핵심 기술이 필요하다.

반도체 설계와 장비를 주도하는 미국은 한국과 대만에 맡겼던 생산 역량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D램 시장에서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한다. 생산기술에 관한 한 초격차 경쟁력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기도 평택 3라인,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이 그 현장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 사이에서 아직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무기를 잃는 순간 목소리도 사라지게 된다.



이현상(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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