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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현장을 가다] "건포도가 열렸다"…목마른 시칠리아 포도밭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덮친 폭염과 가뭄, 와인 생산 타격 시칠리아 당국의 행정 무능과 맞물려 와이너리 '물 부족 SOS'

[기후위기현장을 가다] "건포도가 열렸다"…목마른 시칠리아 포도밭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덮친 폭염과 가뭄, 와인 생산 타격
시칠리아 당국의 행정 무능과 맞물려 와이너리 '물 부족 SOS'

[※ 편집자 주 = 기후위기는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탄소중립을 위한 전 세계적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기의 수위는 해마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북미, 유럽, 아시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 등 글로벌 특파원망을 가동해 세계 곳곳을 할퀴고 있는 기후위기의 현장을 직접 찾아갑니다. 폭염, 가뭄, 산불, 홍수 등 기후재앙으로 고통받는 지구촌 현장을 취재한 특파원 리포트를 연중기획으로 연재합니다.]


(시칠리아[이탈리아]=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이탈리아 서남부 섬 시칠리아의 포도밭에서 만난 안토니오 풀리지 씨는 적포도 두 송이를 딴 뒤 한 손에 하나씩 건넸다.
하나는 잘 익은 포도가 알알이 박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알이 대부분 쪼글쪼글하고 크기도 작았다.
직접 들어보니 무게의 차이도 확연했다. 잘 자란 포도송이는 묵직한 느낌을 줬지만, 수분이 부족해 바짝 쪼그라든 포도송이는 안타까울 정도로 가벼웠다.
풀리지 씨는 "이 무게의 차이가 바로 농부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의 차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송이씩 손에 움켜쥐고 힘을 줬다.
건포도에 가까운 상태로 변한 포도송이에선 즙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성한 포도송이는 힘을 주자마자 과즙이 손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5일(현지시간) 찾은 시칠리아섬의 서쪽 끝 트라파니 지역에 있는 와인 농장은 시칠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총 세 곳을 방문했는데, 모두 시칠리아 최대 와이너리 중 하나인 콜롬바 비앙카가 소유한 포도밭이다.
이탈리아어로 '흰 비둘기'를 뜻하는 콜롬바 비앙카는 오가닉(유기농) 와인으로 유명한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가 시칠리아 전역에 걸쳐 소유한 전체 6천800㏊ 포도밭 가운데 1천847㏊에 이르는 유기농 포도밭이 트라파니 지역에 집중돼 있다.
자연 친화적인 재배 방식을 고수하기에 시칠리아를 넘어 유럽 전체를 덮친 최악의 폭염과 가뭄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방문한 포도밭에선 청포도 품종인 그릴로를 재배하고 있었다.
그릴로 재배 포도밭은 성한 포도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포도송이 중 직사광선에 그대로 노출된 쪽은 줄기에 매달린 채로 건포도가 됐다.
포도알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갈색으로 변했고, 누렇게 변색한 포도 잎사귀는 손으로 만지자 바스락거리며 부스러졌다.
다음으로 방문한 포도밭에선 시칠리아의 대표 토종 레드 품종인 네로 다볼라를 재배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어느 토질에서나 잘 재배된다는 소개가 무색할 정도로 이 포도밭 역시 바짝 마른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포도밭에선 기계식으로 포도를 수확하는 작업이 벌써 진행되고 있었다.
작업하던 니콜라 안질레라는 "이곳에 있는 포도나무는 올해 심은 것"이라며 "포도밭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수확 시기를 2주일 정도 앞당겼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서남부에 있는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면적도 제주도의 13배나 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미식 문화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과 높은 고도, 화산 토양 속에서 탄생한 시칠리아 와인은 독특한 풍미를 앞세워 최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트라파니에서 만난 포도 농부는 시칠리아 와인의 미래를 걱정했다.
시칠리아에서 수십 년간 포도를 재배했다는 그는 기후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특히 해가 갈수록 높은 기온과 열대성 날씨가 이어지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3월에 비가 온 뒤로 비 구경을 하지 못했습니다. 수확 철이 가까워진 지금은 갑자기 비가 올까 봐 또 그게 걱정이에요"
73세의 자코모 트랑기타 씨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예년만 해도 한주가 더우면 한주는 시원했다"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6월부터 더운 날씨가 쭉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9월 초였고, 오후 4시를 넘은 시각이었지만 트라파니의 수은주는 37도를 가리켰다.
능선을 따라 늘어선 풍력 발전기가 왜 설치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바람 한 점 없는 건조한 날씨였다.
시칠리아섬의 평균 온도는 지난 30년간 1도 올랐다. 최근 남부 지역 중에는 6월에 45도까지 오른 곳도 많다.
시칠리아 남동부 도시 시라쿠사는 지난해 8월 11일 낮 최고 기온이 48.8도까지 치솟아 유럽 대륙 내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을 세웠다.

와인 생산업자들은 기온 상승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수확량은 줄어들지 몰라도 고품질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록적인 폭염이 장기간 이어지고 가뭄까지 겹친다면 품질 저하는 피할 수 없다.
특히 수령이 어린 포도나무에는 치명적이다. 뿌리가 얕아서 물을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이상 기후로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와이너리는 가뭄에 대비해 저수지를 마련하고 물을 저장하는 등 긴급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올해 이탈리아가 70년 만의 최악으로 평가되는 가뭄을 겪었지만 유명 와인 산지인 피에몬테, 토스카나 지역의 피해가 우려한 것만큼은 크지 않았던 배경이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달랐다. 콜롬바 비앙카의 레오나르도 타스케타 회장은 올해 와인 생산량이 평년 대비 20% 정도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가뭄도 가뭄이지만 시칠리아에 있는 다목적 댐이 제구실을 못하면서 시칠리아 와이너리는 매년 상습적인 물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
시칠리아 언론에선 6월 당국이 댐 안전 점검을 이유로 저장한 물을 바다로 방류하자 소중한 물 자원을 아무 계획 없이 허비하고 있다며 질타하기도 했다.
타스케타 회장은 "시칠리아의 연간 강우량은 적지 않다"며 "내린 비를 잘 저장했다가 가뭄 때 활용하면 되는데 댐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기후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내년은 올해보다 더 심한 폭염과 가뭄이 덮칠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타스케타 회장은 "가뭄에 더 강한 품종으로 바꾸든지, 그것도 안 되면 자연적으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포도밭은 포도 농사를 접어야 한다"고 말했다.
타스케타 회장에게 가뭄 피해를 덜 받도록 수확 시기를 지금보다 더 앞당기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포도 열매가 자라서 맛을 내기까지 자연은 그만큼의 시간을 요구하는 데 우리가 그 시간을 바꿀 순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chang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신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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