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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업 막길" 호소문에 들통났다, 참 느린 '고속철 경쟁력' [뉴스원샷]

교통전문기자의 촉: 고속열차와 경쟁력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한국형 고속열차 G-7. 사진 국토교통부
2005년 12월 초, 국내 철도 분야에 기적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실시한 신규 고속열차 입찰에서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한 '한국형 고속열차(일명 G-7 열차)'가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TGV)를 이겼다는 것이다.

알스톰사는 앞서 2004년 개통한 경부고속철도의 차량(KTX)을 납품한 바로 그 회사다. 우리에게 고속열차 기술을 전수해준 업체를 누르고, 10량 한 편성씩 모두 10편성(약 3000억원)의 납품권을 따냈으니 그야말로 쾌거였다.

프랑스,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자체 기술로 제작한 고속열차를 운행하는 나라가 되는 셈이었다. 그 G-7을 개량해서 납품한 게 바로 'KTX-산천'이다. 처음 명칭은 'KTX-Ⅱ(투)' 였다.

1996년부터 한국철도기술연구원과 현대로템 등이 공동으로 개발을 시작한 G-7 열차는 시험주행 거리 12만㎞를 넘어 국제기준을 달성했고, 최고 시속 350㎞도 돌파했지만 사실 약점이 적지 않았다. 우선 당시 개발한 G-7 열차는 10량이 아닌 7량 한 편성이었다.

게다가 개발 관계자들과 더미(시험용 인형)만 태우고 시험주행을 했을 뿐 실제로 많은 승객을 태우고 달려본 적이 없었다. 반면 알스톰사는 국내외에서 이미 많은 상업운행 실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G-7이 이길 수 있었던 건 국산화율이 92%로 높다는 점이었다는 게 당시 코레일 설명이었다. 국산화율이 높다는 건 그만큼 국산 부품의 비중이 커 국내 철도부품 산업 육성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였다.

우리가 개발한 고속열차를 국내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외국 수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위기감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세계 철도업계에는 아무리 우수한 제품이라도 남이 쓰지 않은 제품을 먼저 쓰는 모험은 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다고 한다.
G-7을 개량해 납품한 고속열차가 KTX-산천이다. 사진 코레일.

어쨌든 G-7이 수주에 성공하면서 정부와 철도업계는 상당히 고무됐다. "입찰 성공으로 한국형 고속열차의 상용화가 이뤄지게 됐다. 앞으로 중국, 미국, 대만, 미국 등 고속철도 건설을 추진하는 국가들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심지어 국산 고속열차가 상용화될 경우 향후 20년간 생산 유발 효과가 약 26조원, 고용 유발 효과가 16만 명에 이른다는 연구기관의 분석까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16년여가 흐른 지금 국내 열차업계의 경쟁력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슨 일일까. 최근 국내의 고속열차 부품업체들은 코레일이 조만간 발주할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인 'EMU-320' 136량(8량 한 편성씩 총 17편성)의 입찰을 앞두고 호소문을 냈다.

"(곧 있을 고속열차 입찰에서) 해외 업체 참여를 무분별하게 허용하면 철도산업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발주금액은 약 7000억원 규모다.

속사정은 이렇다. 지금까지 국내 고속열차 입찰은 대부분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로템이 독점해왔다. 계약도 거의 수의계약으로 이뤄졌다.


국제입찰로 진행됐지만, 외국 업체들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참여를 꺼린 데다 국내에서 고속열차를 제작할 수 있는 곳은 현대로템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의 철도차량 제작업체인 '탈고'가 국내 중소 철도차량업체인 우진산전과 손잡고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서 열차를 만드는 업체는 현대로템과 중소기업인 우진산전, 다원시스 등 3곳이 있다.
동력분산식 열차 제원비교. 자료 현대로템

철도업계에선 그동안 우진산전이 고속열차 시장 진입을 노리면서 해외에서 파트너를 물색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진산전은 고속열차 제작 경험이 전혀 없어서다.

이대로라면 2005년 알스톰 이후 17년 만에 해외업체가 국내 고속열차 입찰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사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본사를 둔 탈고는 매출 규모나 기술 수준으로 보면 세계 정상급 기업은 아니라는 평가다.

게다가 코레일이 발주하려는 동력분산식(EMU) 고속열차는 탈고의 주력 종목도 아니다. 고속열차의 구동방식은 동력집중식과 동력분산식으로 나뉜다. 동력집중식은 KTX나 KTX-산천처럼 기관차가 뒤에 이어진 객차를 끌고 가는 방식이다.

반면 동력분산식은 별도의 기관차가 없는 대신 객차들 밑에 분산 배치한 동력(모터)을 이용해서 달린다. 동력이 여러 개인 만큼 빠른 속도를 내는 데 유리하다고 한다. 현대로템이 제작한 준고속열차인 'KTX-이음'이 대표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내 부품업체들이 탈고의 입찰 참여를 막아달라고 호소한 건 그만큼 우리의 고속열차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사실상 현대로템의 경쟁력이 약하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제작 기술도 기술이지만 가격 경쟁력도 취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현대로템이 탈고와의 기술 경쟁에서 불리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많다"며 "현대로템과 연관이 깊은 부품업체들이 그래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현대로템이 제작한 동력분산식 준고속열차인 KTX-이음. 6량 한 편성이다. 연합뉴스

실제로 현대로템이 최고시속 250㎞대의 KTX-이음을 만들었지만, 코레일로부터 수주한 시속 320㎞대의 EMU-320은 심한 소음 등의 문제로 재설계에 들어가 납기가 3년가량 미뤄졌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현대로템이 고속열차 납품을 위한 수의계약을 맺으면서 계속 가격을 올려왔다"며 "최근에는 한량당 50억원이 넘을 거란 예상도 있다"고 말했다. 기존에 납품한 KTX-산천은 한량당 33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기술력 차이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탈고·우진산전 컨소시엄이 예상보다 낮은 금액으로 입찰에 나선다면 현대로템이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번 코레일의 발주 물량 외에 수서고속철도(SR)도 동력분산식 고속열차 구매에 나설 예정인 데다, 이르면 2027년부터 코레일이 구형 KTX를 대체할 동력분산식 열차를 순차적으로 발주할 계획이어서 전체 물량이 수조 원에 달할 거란 전망이다.

이렇게 보면 상당 기간 다시 오기 힘든 큰 장이 서는 셈이다. 이번 입찰에 성공하면 선점 효과 덕에 뒤이어 나오는 발주 물량을 따낼 확률 역시 높아질 수 있다. 탈고가 저가입찰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우리의 고속열차 경쟁력이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게 온전히 현대로템 탓만은 아니다. 과감한 기술투자를 할 만큼 국내 시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씩, 그것도 조금씩 나오는 물량을 바라보고 막대한 투자를 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스페인 탈고가 제작한 고속열차 '탈고 350'. 위키백과

그렇다고 앞선 기술과 자본력을 가진 프랑스, 일본, 독일, 중국 업체들과 해외 시장에서 경쟁해 이기기도 쉽지 않은 여건이다. 이런 사정 탓에 부품업체들이 사실상 탈고의 진출을 막아달라는 호소문을 내고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꾸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국내 시장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경쟁을 막고, 사실상 독점체제를 지속해서는 고속열차의 경쟁력은 결코 나아질 수 없다. 독점이 이어지면 차량 가격은 계속 높아지고, 결국 운영기관의 부담만 늘게 된다. 대 승객 서비스를 떨어뜨릴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또 해외 철도시장 진출을 노리면서 우리 국내 시장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을 걸어 잠근다면 해외 입찰에서 우리 역시 똑같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단순히 문을 닫기보다는 경쟁을 통해 보다 우수하고 저렴한 차량을 구매토록 하고, 차량 제작에 국산 부품 사용률을 크게 높이는 방안을 찾는 게 나을 듯 싶다.

또 차제에 정부와 철도운영기관, 그리고 철도차량업계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우리 철도산업의 경쟁력을 어떻게 제고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강갑생(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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