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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나는 일본인 아내입니다"…'부용회' 생존자 93세 야마구치씨

[영상] "나는 일본인 아내입니다"…'부용회' 생존자 93세 야마구치씨

[https://youtu.be/D9bwoaLPRI4]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안녕하셨어요? 와타시와(私は)…"
지난달 22일 인천 남구의 한 연립주택 반지하 방에서 만난 '재한 일본인 처(妻)' 야마구치 마스에(山口眞須惠·93)씨.
카메라를 보고 인사말을 해달라고 하자 두 손을 합장한 채 한국말로 '안녕하셨어요?', 일본말로 "와타시와(저는)…"라는 말을 하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한일관계라고 하면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처럼 한국인 피해 여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 안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은 한 몸'이라고 한 식민지 지배 논리)'가 강조되던 일제 시대, 조선인 남성과 결혼해서 '재한 일본인 처'라고 불린 이들이다. 한일 국제결혼 1세대인 셈. 일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조선인 남성과 부부가 됐고, 일부는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이나 징용자를 만나 대한해협을 건넜다. 총 2천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들 중 1천200여명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남은 이들은 1998년에만 해도 500여명에 이르렀지만, 그 후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경주 나자레원에 4명, 인천에 1명 등 5명이 살아있을 뿐. 치매로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인천의 야마구치씨를 만났다.
-- 몇 년에,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 쇼와 4년(1929년)에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태어났습니다.
-- 남편은 언제 만나셨나요.
▲ 고등학생 때, 유학생(남편은 도쿄음악학교에 다녔다고 함)이던 남편(전청균)을 만났습니다. 애가 생겨서 18살 때 (한국에) 왔습니다. 많이 싸웠지만 (남편) 인간성이 좋았어요. 모르는 건 잘 가르쳐줬거든요.

1남2녀 중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이름은 '야마구치 마스에'를 사용했다. 남편은 처음엔 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공무원이 됐고, 서울 성북경찰서 등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남편이) 경찰에 왜 들어갔느냐면 내가 '일본사람'이 되다 보니까 옆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쪽발이 년'이니 뭐니 해서…그런데 남편이 경찰복 입고 왔다 갔다 하니까 남들이 찍소리도 못하더라고요."
지금 들으면 '설마 그랬을까' 싶지만 더한 시절도 있었다. 해방 직후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일본인 아내들은 심지어 말을 못 하는 체했을 정도. 일본인 추방 정책을 편 이승만 대통령 때는 더 했다. 6·25 전쟁 때 자식이 굶어 죽은 경우도 있었다. 죽는 이가 수두룩하던 시절, 일본인 여성과 그 아이를 챙길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식을 키우느라 이 땅을 떠나지 못했지만, 3·1절이나 8·15 같은 날이 되면 '일본 엄마'는 아이들이 피해를 볼까 봐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야마구치씨도 마찬가지였다. "애들 키울 때 일본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애들한테 지장 갈까 봐…"
부용회 후원회(회장 안양로)에 따르면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시어머니는 물론, 자식들의 구박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살던 이들은 한국전쟁 중 각종 부역에 종사한 걸 계기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1961∼1962년 서울 명동성당 이탈리아인 신부의 호의로 '일본어 성경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 이를 계기로 1963년 5월 '재한일본인처의 모임'을 발족했다.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온 자신들의 처지를 연꽃(芙蓉)에 비유했는지 1966년 '부용회'로 이름을 바꿨고, 그때부터 '부용회 할머니'로 불렸다.
야마구치 할머니도 조심할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남편이 경찰관이어서 남들이 '일본년' 소리를 하지 못했다"는 말과 자신이 얼마나 조심조심 살아왔는지를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먹고살 만해요. 우리 영감이 경찰에 있어서…그 대신 욕먹을 일 안 하고, 남 흉보지 않아야 해요."
"(남편) 성질이 꼿꼿했어요. 우리 영감이 무서웠어요. 욕먹는 짓 하면 난 죽어요. 내가 '일본년' 되다 보니까 남 욕먹을 일 안 했어요. 지금은 '일본년'이나 '쪽발이'라는 말하는 사람 없어요. 행동 조심, 말조심, 인심 잃지 말아야 하고, 있으면 풀고, 없으면 말고…"
"(누가) '쪽발이 년'이라고 그러길래 오라고 해서 '나 이름이 있습니다. 야마구치 마스에'라고 했어요"
야마구치씨는 남편 전씨가 수십년 전 먼저 타계한 뒤에도 남편과 살던 집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달 22일 함께 집에 찾아간 안 회장이 후원금과 음식을 건네자 남편의 사진을 모신 안방 불단에 바치고 두 손을 모았다. 주변에선 다른 할머니들처럼 경주 나자레원으로 들어가라고 권하지만, 야마구치씨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지난달 22일 만났을 때도 남편 얘기를 하면서 한국말로 "우리 영감탱이는…"이라고 하더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내가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요"라며 웃었다. '영감탱이'라는 말도 애정이 있어서 할 수 있는 표현인 듯했다.
1998년부터 부용회 할머니들을 도와온 안 회장은 "그동안 많은 할머니를 만났지만, 야마구치 할머니처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온 분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고향 홋카이도에는 지난 2001년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번 다녀왔다. "(친정) 어머니가 울더라고요.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한국에 왔다 갔다 합니다."
부용회 전체 모임은 2012년이 마지막.
그 후 대방동 사무실이 문을 닫았고, 부용회의 중심인물인 구마다 가즈코(熊田和子) 회장마저 지난해 7월8일 별세했다. 남은 5명도 야마구치씨처럼 모두 90대. 그동안 한일 언론이 단편적으로 부용회의 존재를 언급하긴 했지만, 책 한 권 남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한 번 더 찾아가 만났을 때 야마구치 할머니에게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불러달라"고 부탁하자 이미자의 '님이라 부르리까', '울어라 열풍아', 백난아의 '찔레꽃'이 잇따라 흘러나왔다.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마음으로만 그리워 마음으로만 사무쳐 애타는 가슴/그 무슨 잘못이라도…"('님이라 부르리까')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가는 임을 웃음으로 보내는 마음/그 누구가 알아주나/기막힌 내 사랑을"('울어라 열풍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찔레꽃')
'찔레꽃 피는 남쪽 나라'가 홋카이도 삿포로일 리는 만무한 일. 조선인 청년을 사랑한 일본인 아내가 진정 그리워한 고향은 어디였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chungwo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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