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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산 아래 강진만 푸른 바다, 대붕이 하늘로 솟구칠 듯

전남 강진 주작산
김정탁 노장사상가
한국에서 사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산행하는 즐거움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전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데다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가까이서 산행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서다. 또 대부분 산이 1000m 미만인지라 정상까지 올라가 내려오는 데 하루면 족하다. 게다가 한국의 산은 정상부로 올라갈수록 산의 뼈라 할 수 있는 암반 부분이 많이 드러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드러난 산의 뼈가 잘 깎여서가 아니겠는가.

남북으로 만덕산~달마산에 연결
백두대간의 마지막 장식한 명승

바다에 널린 섬들은 곧 우리 자신
망망대해 앞에선 마음도 텅 비어

산도 바다도 평평한 ‘허의 세상’
분파·차이 넘어선 소통의 뜻 배워

한국의 산이 이런 모습을 지닌 건 산이 일찍 생성돼 흙이 많이 흘러내리고, 풍화작용도 오랫동안 이뤄져서다. 늦게 생겨난 산일수록 흘러내린 흙이 적어서 정상에 올라도 산 아래 평지가 잘 보이지 않고, 여전히 산속에 있다는 느낌만 든다. 북미 로키산맥을 고속도로로 해발 3000m까지 무난히 오를 수 있는 것도 산의 이런 특성 탓이다. 또 한국의 산은 철마다 모습을 달리해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위도가 높으면 추위 때문에, 낮으면 병충해 때문에 산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산은 그럴 염려가 전혀 없다. 그래서 365일 산행이 언제든 가능하다.

국내 최고의 산행 코스로 꼽을 만

전남 강진 주작산은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듯한 형상이다.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지점이 최고봉이다. 산 너머로 보이는 강진만도 절경이다. [사진 강진군청]
젊었을 때는 산의 높이와 관계없이 전국의 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나이가 들수록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해 아쉽다. 그래서 높지 않은 산을 즐겨 찾게 되는데 강진의 주작산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물론 강진을 대표하는 산은 월출산이지만 큰맘을 먹지 않으면 정상까지 오르기 힘들다. 정약용도 강진 유배 시절 월출산 등반을 두 번 시도했지만, 정상을 밟지 못하고 중간에 모두 내려왔다. 지금은 산길이 잘 나 있어 그때보다 쉽겠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산은 결코 아니다. 반면 주작산은 높이가 400여 미터에 불과해 웬만하면 정상 산행이 가능하다.

주작산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왼쪽에 완만한 푸른 봉우리가 주작의 모습을 한 봉우리이고, 강진만 넘어서엔 완도 앞바다가 보인다. [사진 김정탁]
주작산은 남쪽으로는 두륜산과 대흥산, 그리고 멀리 달마산까지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덕룡산과 석문산, 그리고 만덕산으로 연결된다. 다산이 유배 시절 초당을 짓고 머문 곳이 만덕산이다. 그런데 만덕산-석문산-덕룡산-주작산-두륜산-대흥산-달마산으로 이어지는 산의 맥은 백두대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또 만덕산 아래에는 백련사가, 두륜산 아래에는 대흥사가, 달마산 아래에는 미황사가 각각 자리해 산의 품위를 더한다. 강진만 건너 맞은편에서 이 산들을 바라보면 일자로 연결되어 여기를 종주하면 강진만과 완도 앞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산행코스라 할만하다.

물론 바다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산은 우리나라에 수두룩하다. 삼면이 바다여서 더욱 그러하다. 한산도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통영의 미륵산, 확 트인 남해를 감상할 수 있는 여수의 향일암, 다도해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고흥의 팔영산 등이 그러하다.

『장자』 속 ‘대붕의 비상’을 만나다

주작의 모습을 한 주작산 봉우리 전경. 마치 강진만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다. [사진 김정탁]
이 산들의 바다 경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만덕산에서 달마산으로 이어지는 바다 경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중에서 덕룡산과 주작산 사이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경관은 압권이다. 섬들이 연이어 펼쳐진 바다를 높은 곳도 아니고 낮은 곳도 아닌 적당한 곳에서 바라보는 데다가 강진만 건너에는 천관산까지 마주하고 있어 바다가 망망하지 않고 정겹다.

또 덕룡산과 주작산은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덕룡(德龍)은 덕을 갖춘 용이고, 주작(朱雀)은 남쪽을 지키는 붉은 봉황이다. 전국 어디를 가도 산 이름을 하늘을 나는 동물로 지은 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이 동물들은 우리가 가장 귀하고 신비롭게 여기는 용과 봉황이 아닌가.

주작산에서 남동쪽을 바라보면 강진만이지만 북서쪽으로는 멀리 월출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어째서 주작산일까. 산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저 멀리에서 주작의 모습을 한 큰 봉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걸어서 내려가 그 봉우리에 오르면 주작에 올라탄 느낌이 들어서 강진만을 훨훨 날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다. 그래서 『장자』 첫 부분을 장식하는 ‘대붕의 비상’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강서중묘에 남아 있는 주작도 벽화. [중앙포토]
육지는 바다와 달라서 평평하지 않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구릉도 있어서다. 그런데 주작산을 올라타서 대붕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도 바다처럼 평평하다. 아주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기에 산과 강, 구릉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서다. 그래서 하늘이 푸른 것처럼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땅도 온통 푸르다.

여기서 장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의 전환을 한다. 그건 하늘이 원래 푸른지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인데 하늘도 너무 멀리 떨어져서 푸른색 하나로 통일돼 보인다고 생각해서다. 흥미로운 건 푸른색 하나로 통일돼 보이는 게 장자가 우리를 소통의 길로 안내하는 모티브이다.

메추라기와 원숭이가 큰 뜻 알겠나

조선 순종 때 창경궁 인정전에 걸렸던 봉황도 족자.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장자는 대붕과 반대되는 동물로 메추라기를 든다. 메추라기는 높이 날지 못해 본의 아니게 아래를 꼼꼼히 내려다본다. 그래서 ‘7’로 보지 않고, ‘3+4’와 ‘4+3’으로 구분해서 본다. 원숭이도 메추라기처럼 구분해 먹이 주는 방식을 ‘아침에 넉 되, 저녁에 석 되’로 고집한다. 이것이 유명한 조삼모사 우화다.

그러니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푸른색 하나로 통일돼 보는 대붕의 뜻을 원숭이가 어찌 헤아리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이런 원숭이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아니 원숭이보다 더해 ‘3+4’를 ‘3+2+2’와 ‘3+1+3’으로까지 구분해서 우열을 가리려고 든다. 이런 인간에게 어찌 소통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조선시대 선비도 똑같이 이런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분파 작용을 계속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각각 나뉘었다. 또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 등으로 나뉘었다. 유가 지식인이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차이를 통해서 앎에 이른다고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이 보여준 차이의 극대화는 지나치다.

그러니 사람이 어찌 원숭이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차이의 극대화에 따른 행동은 지금도 계속된다. 정치인들이 특히 심해 틈만 나면 분파 작용을 하는데 분파 자체를 정치적 자산처럼 여기는 듯하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좁은 마음을 지닌 사람도 화내지 않는다. 그런데 배 위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숨을 크게 들이쉬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당장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째로 소리칠 텐데 그러면 반드시 욕설이 따른다. 조금 전에는 화내지 않다가 지금 화내는 건 조금 전에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어서다.”

시장바닥에서 깨우친 ‘허’의 지혜

『장자』 산목(山木)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딪친 배에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지만 사람이 없으면 화를 내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화를 내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다. 그렇지만 화를 받아줄 사람이 있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 마음을 크게 비워야 가능해서다.

장자는 이런 비움을 허(虛)라고 말한다. 불가는 허 대신 공(空) 개념을 사용한다. 소통과 관련해서 허와 공 사이엔 차이가 있다. 상대가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면 허이고, 없는 상태에서 마음을 비우면 공이다. 그래서 산속에 홀로 들어가 마음을 비우면 공이다. 장자는 시장바닥과 같은 치열한 삶의 공간에서 비움을 강조하기에 허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비우는 건 ‘공’이 아닐까. 반면 섬들이 이어진 바다와 마주하면서 마음을 비우는 건 ‘허’가 아닐까. 바다에 널려진 섬들이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져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늘 부딪치며 살아가기에 자신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려 든다.

그렇다면 섬들이 널려 있어도 그 섬의 존재를 잊고서 텅 빈 바다를 연상할 수 있다면 허의 상태에 이른 게 아닐까. 주작산에서 섬들로 연결된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이런 허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면 소통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지 않겠는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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