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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우크라이나전 후유증, '회색 코뿔소' 가스 대란 덮친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유럽발 가스 파동 공포
"겨울이 오고 있다. (Winter is coming)"

최고의 미국 드라마로 꼽히는 '왕좌의 게임'.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들이 쉴 새 없이 외쳤던 게 바로 이 구호다. 살을 에는 겨울이 오면 북녘땅의 괴물들이 몰려오니 어서 대비하라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 속 구호가 요즘 수많은 유럽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된 때아닌 가스 대란 때문이다. 서방측 제재를 받게 된 러시아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6월 이후 유럽행 액화천연가스(LNG) 공급을 확 줄이면서 가스 파동이 난 것이다. 유럽에선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난방·취사를 주로 천연가스로 해결한다. 가스 발전의 비중도 20%를 넘는다. 이 때문에 지금 유럽인들은 불필요한 가로등 끄기는 물론 찬물로 샤워하기 등 월동용 가스를 비축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벌이고 있다.
문제는 유럽의 가스 파동이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거다. 지금까진 도시가스 요금이 크게 오르지 않아 국내 소비자들이 실감하지 못하지만 폭등한 천연가스 가격을 고려하면 큰 폭의 인상이 불가피하다.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가스 대란이란 '회색 코뿔소'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졌고 향후 전망은 어떤지 짚어본다.
우크라이나 서쪽에 위치한 볼리베츠 가스관 시설 모습. 유럽에 천연가스를 공급해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지난 6월부터 갑자기 공급량을 큰 폭으로 줄였다. AP

유럽의 목 죄는 러시아 가스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스 파동은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러시아의 공급 축소에서 비롯됐다. 천연가스 가격은 우크라이나전 발발 전까지만 해도 80유로를 넘지 않았다. 그랬던 게 전쟁이 터지면서 한때 300유로까지 치솟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서방측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응징하겠다며 금융·무역 및 석유 부문에 관련된 경제 제재를 단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잠그기 시작한 까닭이다. 실제로 러시아의 국영기업 가스프롬은 지난 6월 독일로 연결된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의 공급량을 최대 1억 6700만㎡에서 40% 수준인 6700만㎡로 줄였다. 이뿐 아니라 러시아는 지난달 27일 이를 다시 평소의 20% 수준인 3300만㎡로 다시 축소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노르트스트림-1의 유지·보수를 이유로 31일(현지시간)부터 2일까지 3일간 가스 공급을 완전히 차단 중이다. 말로는 이상이 없으면 공급을 재개한다고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고 가스를 끊을지 모를 일이다. 러시아의 이 같은 가스 무기화에 맞서 서방측도 에너지 절약 운동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당분간은 고전할 수밖에 없다.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워낙 높은 데다 단시간 내에 마땅한 대체재를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독일·프랑스 등은 러시아로부터 가스관을 통해 기체 상태의 천연가스를 공급받아 이를 각 가정과 공장 등에 나눠줘 왔다. 하지만 이를 대체하려면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가스를 액체 상태로 들여와 저장한 뒤 다시 기체로 환원하는 시설이 필요하다. 러시아산 가스 공급 중단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된 독일에는 이런 시설이 없는 데다 새로 지으려면 수년이 걸려 뾰족한 해법이 없는 형편이다.

러시아-유럽간 가스관 및 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
공포에 질린 유럽
이 때문에 현재 유럽인들은 가스 없는 겨울을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최악의 경우 에너지 배급제가 실시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각국 정부는 물론 시민 단체까지 나서 필사적인 전기·가스 절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 가스를 저장해 놔야 추위가 몰아닥칠 겨울을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유럽 전체적으로 전기의 22%가 가스로 만들어진다. 절전이 바로 가스 절약인 셈이다. 절약 방식은 나라별로 다양하다.
가스 파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거로 예상되는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천연가스 의존도가 55%에 달하는 데다 탈원전 정책까지 추진해 왔다. 또 러시아 대신 다른 나라에서 가스를 들여오려 해도 액체 상태의 액화천연가스(LNG)나 액화석유가스(LPG)를 보관할 저장시설도, 이를 기체로 되돌릴 기화 설비도 마련돼 있지 않다. 때문에 러시아 가스가 끊기면 공장 가동이 멈춰 수만 명의 실업자가 생기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큰 피해가 예상된다. 독일의 중앙은 물론 지방 정부까지 나서 에너지 절약에 혈안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수도 베를린에서는 관광 명소 200여 곳의 조명등을 껐으며 다른 대도시에서는 가로등의 밝기를 줄이고사용량이 적은 신호등의 작동도 중단했다. 아울러 공공시설 내에서 사람의 왕래가 적은 복도와 대형 강당 등은 상시 난방을 금지됐다.
프랑스는 전기 낭비를 차단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 정책을 발표하고 시행 중이다. 구체적으로는 냉난방 중인 상가가 문을 연 채 영업하지 못하게 했다. 또 새벽 1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일체의 광고용 전등을 꺼야 한다. 올해 40도가 넘는 무더위로 2000명 이상이 숨진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 당국은 여름엔 27도 밑으로, 겨울엔 19도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걸 금지했다. 또 난방 장치가 작동되면 저절로 상점문이 잠기는 자동 잠금장치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와 함께 오후 10시 이후엔 모든 상점이 불을 꺼야 한다.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는 샤워 5분 내 하기 운동이 벌어졌고, 이탈리아에서도 스페인과 같은 냉난방 규제가 시행되고 있다.
지난달 31일 불 꺼진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시는 최근 우크라이나전으로 에너지 대란이 일어나자 전기 절약을 위해 관광지의 전등을 모두 끄기로 결정했다. 로이터

화석 연료의 부활
러시아의 가스 무기화로 유례없는 고통을 겪게 된 유럽인들은 에너지 확보를 위해 모든 수단을 쓰고 있다. 폐쇄하기로 했던 석탄·석유 등 화석 연료 발전으로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영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 환경 문제로 석탄 발전소를 닫기로 했던 유럽 국가들은 방침을 바꿔 폐쇄 시기를 늦추거나 문 닫았던 시설을 재가동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앞으로 14기의 원전을 추가 건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올해 말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려던 독일도 가동 중인 3기의 수명 연장을 검토하고 있다.
반면 이번 가스 파동이 장기적으로는 재생 에너지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라는 분석도 많다. 실제로 독일은 지난 23일 캐나다와 친환경 '그린 수소(Green Hydrogen)'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수소 동맹'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린 수소란 신재생 및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 물을 전기 분해해 얻는 수소를 뜻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우려되는 가스 요금 인상
유럽발 가스 파동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초 가스 문제와 관련된 언론의 질문에 "올겨울에 전혀 문제가 없도록 안정적으로 비축해 와 시간이 지나면 충분할 것"이라며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장담했었다. 이런 자신감 뒤에는 한국이 전체 LNG 수요의 80%가량을 카타르 등과의 장기계약에 의해 들여온다는 사실이 작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20%를 국제 현물시장에서 비싸게 들여와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현물시장에서의 천연가스 가격은 1년 전보다 10배가 뛰었다. 이런 높은 가격에도 러시아로부터의 공급선을 잃은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든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아시아로 돌려졌던 천연가스 물량을 놓고 유럽과 아시아 국가 간의 피나는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 겨울철 전기 수요가 에어컨을 집중적으로 켜는 여름보다 더 크다. 저렴한 전기료로 인해 각 가정에서 전기 히터 등을 큰 부담 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1월의 평균전력량은 7만3600여 MW로 지난 여름철 전기 수요가 가장 많았던 2021년 7월 (7만2700여 MW)보다 많았다. 올겨울 발전용 가스 수요가 크게 늘 거라는 얘기다.
우크라이나전 발발 이후 국제 시장에서 천연가스값이 천정부지로 뛰는데도 당국은 도시가스 가격을 억눌러왔다. 그러나 국제시장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도시가스를 원가보다 훨씬 싼 값으로 장기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도시가스공사는 이미 5조원의 미수금에 허덕이고 있다. 여기에 환율 급등까지 겹쳐 당국은 10월 중 상당 폭의 도시가스 요금 인상을 검토하고 있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가스 파동이 갈수록 심화하는 형국이다. 천연가스 등 에너지 확보를 위해 온 나라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비상 상황이다.



남정호(nam.j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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