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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9번 중 5번이 정권 연장용…개헌은 국민통합 계기 돼야

70년간 9차례, 개헌의 추억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1987년 민주화의 결과로 9차 개헌이 있은 지 35년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30년이 넘도록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의 경우 헌법의 부분 개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에 따라 조항 개정이 진행되는데 반해 한국의 경우 헌법 개정은 조금만 수정해도 국회와 국민의 투표를 거쳐야 한다.

한국에서 개헌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정권 연장 수단으로 개정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발췌개헌’으로 알려진 1952년 1차 개헌은 대통령 선거를 직선으로 바꿈으로써 국회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도록 했다.

1952년 1차 ‘발췌개헌’, 1954년 2차 ‘사사오입’ 이승만 집권 연장
1969년 6차 ‘3선 개헌’, 1972년 7차 ‘유신개헌’ 박정희 체제 공고화
국회·국민의 활발한 논의 부족해 개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높아
1987년 민주화 개헌 이후 35년…달라진 사회와 시대상 담아내야

1954년 2차 개헌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 이상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헌을 위해 국회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투표 결과 한 표가 모자라 부결되었다. 그러나 당일 저녁 집권 여당에서 사사오입을 생각해냈고, 다음 날 개헌이 의결된 것으로 결과를 뒤바꿨다.

집권연장과 관련 없던 4차 개헌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 2차 개헌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면, 1960년 11월 4차 개헌은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발포 책임자, 그리고 이승만 정부 시기 부정축재자를 소급하여 처벌하기 위한 개헌이었다. 역대 개헌 중에 유일하게 정치권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개헌으로 부칙 개정만이 이루어졌다.

1969년 6차 개헌은 ‘3선 개헌’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두 번만 연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1963년과 1967년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은 1971년 선거를 앞두고 3번째 연임이 가능하도록 개헌을 추진하였다. 3선 개헌은 1958년 보안법 파동 이후 두 번째로 여당만의 날치기 통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특공대의 기습작전을 방불케 했다.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으로 옮겨가는 치밀한 작전의 결과였다. 개헌안이 상정되고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또한 3선 개헌은 개헌 직전 있었던 총선에서 관권을 이용하여 여당을 절대 다수당으로 만든 이후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1954년의 2차 개헌과 유사했다. 부정선거 직후에는 야당 의원들을 회유하여 3선 개헌을 찬성하도록 했다.

특공작전 같았던 6, 7차 개헌

7차 개헌은 그 유명한 유신헌법의 선포였다. 후에 풍년사업으로 알려진 개헌 작업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타이완과 스페인의 총통제를 벤치마킹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그 과정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사전 공론화되지 않은 개헌이었다. 정체불명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99% 지지의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10·26 사건 후 1980년 10월 8차 개헌은 유신헌법의 아류였다. 신군부의 집권을 위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을 지운 정체불명의 대통령 체육관 선거가 계승되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2차나 6차 같은 원포인트 개헌이 가능한 대통령의 7년 단임제 규정이 유일한 변화였다. 또 다른 특징은 국회에서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국회 논의 없이 이루어진 개헌은 5차와 7차 이후 세 번째였다. 5차 개헌과 8차 개헌 시에는 개헌을 논의할 국회가 없었다. 군부는 주요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국가보위대책회의라는 불법조직을 만들어 행정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장악했고, 헌법 개정 작업도 이 조직에서 이루어졌다. 국가보위대책회의는 헌법 개정 논의를 위해 갑자기 국가보위입법회의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잊혀져간 사회적 개헌 논의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제정된 이후 70년이 넘도록 9차례의 개헌이 있었는데, 그중 과반이 넘는 5차례가 헌법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보다 정권 장악 또는 연장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개헌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 개헌안에 반영되지 못했던 논의를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개헌에 대한 국민적 논의가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신군부의 계엄령 이전인 1980년 봄과 2·12 총선 이듬해인 1986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1980년 개헌의 특징은 민주적인 대통령의 선출과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 집중되는 것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대통령의 직접 선거와 4년 임기에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주로 논의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의원내각제로의 개편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4·19 혁명 직후 의원내각제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었지만, 당시 3김의 의지도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하여 계엄령 선포권을 삭제하고 군인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으며, 검찰과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유신헌법으로 삭제되었던 국회의 국정감사권 부활이 논의되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와 관련된 조항에 대한 적극적인 토론이 되었다는 점이다. 연좌제 폐지, 양성평등, 질병의 예방과 치료받을 권리 등이 논의되었고, 국민의 저항권에 대해서도 헌법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통령 궐위 시 국무총리가 아닌 국회의장이 대행해야 한다는 방안도 눈에 띈다.

민주정의당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물론 이러한 논의는 광주항쟁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1987년 헌법에 야당을 통해 이 논의의 일부가 반영되었지만, 6·29 선언 한 달 후인 7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13차에 걸친 국회 논의 이후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전 국민적인 숙의 과정이 없었고, 여당과 야당 간의 정치회담을 통해 정치적인 합의로 개헌안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것은 1986년의 논의과정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2·12 총선의 결과 신군부와 민주정의당은 국민과 야당의 개헌을 위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선에서 실질적으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야당이 개헌 서명대회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여당으로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개헌 논의를 시작했다.

1986년 7월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국회에서의 논의 과정에서는 1980년 봄에 논의되었던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토지공개념과 양성평등, 그리고 최저임금제와 구속적부심제도 도입 등이 함께 논의되었다. 아울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부 여당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편안을 내놓았다는 점이었다.

정부 여당으로서는 1988년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특히 총선에서 비례대표제의 또 다른 이름인 ‘전국구’의 3분의 2 이상을 다수당에 몰아주는 제도하에서 중선거구제를 채택한다면, 정부 여당이 과반수의 국회 의석을 차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제 개편 주장도 나와

1985년 2·12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은 전체 지역구 184석의 반도 되지 않는 87석에서만 당선자를 배출했음에도, 전체 전국구 의원 수(92석)의 3분의 2가 넘는 61석을 가져갔다. 그 결과 민주정의당은 전체 의석의 과반이 넘는 148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헌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아시안게임과 김포공항 테러 사건,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987년의 9차 개헌에서는 1986년 개헌에서 논의된 다양한 의견들을 흡수하지 못했다. (이상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이용한 ‘국무회의록의 재발견’ 참조)

35년이 된 1987년 헌법을 이제는 개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팬데믹은 또 다른 사회변화를 초래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체제도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부작용을 만들어냈던 대통령 중심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의 숙의와 국회의 논의를 거친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국민 통합의 전기를 만드는 개헌 과정이 진행되기를 기대해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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