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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중년 위기

장강명 소설가
지난해 아내와 함께 격하게 중년 위기를 겪었다. 우리 부부가 위기를 겪은 원인은 서로 달랐다고도, 같았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표면적인 이유나 계기는 각각 달랐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양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비슷한 농도의 어둠에 사로잡혔다. 그런 분석이나 평가도 터널 밖으로 나와서 겨우 가능해졌다.

내 경우에는 어느 순간 조용히 주저앉았다. 붙들고 있던 장편소설 원고가 끝이 나지 않을 듯 보였는데, 그동안 점점 ‘내가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이걸 읽어줄 독자가 몇이나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계약금과 인세 지급을 제때 하지 않고 정산 보고를 누락하는 출판사와 긴 분쟁을 벌이면서 한창 초라해지는 기분을 맛보던 중이었다.
지난해 무작정 떠난 제주 여행
삶의 방향 재조정하는 기회로
때론 위기를 겪는 편이 더 낫다

아내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아내는 외국계 대기업에서 팀장급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승진할수록 돈도 많이 주고 일도 많이 시키는 곳이었다. 돈을 적당히 받고 일도 적당히 할 길은 없었다. 바로 위 상사인 최고재무관리자(CFO)가 사생활 없이 회사에 매달리는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본 아내는 삶의 균형을 찾겠다며 중소기업으로 이직했다.

한데 작은 기업이라고 업무량이 적은 게 결코 아니었다. 욕심이 과도한 대표가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일을 지시하는 통에 문자 그대로 주 7일 일을 하게 됐다. 고개를 저으며 회사를 한 번 더 옮겼는데,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졌다. 대한민국의 40대 팀장급 노동자들은 다들 그렇게 일해야 생존할 수 있는 듯했고, 아내는 그 현실에 절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의 위기 덕분에 내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표를 내고 급격하게 우울감에 휩싸이는 아내를 보며 뭐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고 느꼈다. 그때까지 빈둥거리며 침대에 누워만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짐을 꾸린 뒤 아내 손을 잡아끌고 제주도로 떠났다. 아내는 힘없이, 말없이 끌려 왔다.

숙소도 제대로 예약하지 않고 비행기를 탔다. 서귀포에서 시작해서 여기서 이틀, 저기서 사흘, 그런 식으로 며칠씩 머물며 한 달간 제주를 반 바퀴 돌았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기도 하고, 보리밭 사이길을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펜션에서 키우는 개들과 놀기도 하고, 헤엄치는 돌고래들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도 했다.

여행 중반에 말문이 트였다. 그때껏 서로 입에 잘 올리지 않았던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게스트하우스에서 밤늦도록 토론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아내가 말했다. 돈은 크게 벌지 못해도 괜찮아. 독서광인 아내는 대강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정도로까지는 마음을 정리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도 나대로 마음을 정리했다.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할 수도, 다른 글을 쓸 수도 없다. 이게 내가 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최선이다. 손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헛되이 기대하거나 욕심내지 말자.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해나가자.

큰 틀에서는 아내와 내가 같은 고민을 했고,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본다. 우리는 남은 시간과 가진 자원이 한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에 맞춰 삶을 재구성해야 했다. 욕망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진정으로 추구하려는 바를 추렸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마치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유혹과 자아를 구분하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와 얼마 뒤 아내는 지인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 온라인 독서 플랫폼을 만들어 정식 오픈을 앞두고 있다. 아직 매출은 변변찮고,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쉴 새 없이 일하는데, 얼굴만큼은 늘 충만해 뵌다. 재미있고 짜릿하다고 한다. 사람이 1년 새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이상이 우리 부부의 그야말로 뻔한 중년 위기 극복기이다. 발단부터 전개, 결말에 이르기까지 하도 전형적이라 어디에 소개하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하필 또 찾아간 곳이 제주였단 말이지. 그런데 코로나 시국이라 해외에 갈 수는 없었고, 딱히 다른 장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 상투적인 교훈을 하나 덧붙이자면…. 나는 지난해의 경험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다. 때로 위기가 찾아오는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낫다. ‘모든 습관을 뒤엎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며 질병의 가치를 역설했을 때 니체가 의도했던 바도 아마 이것이었으리라.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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