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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많아 좋고, 가격은 거품 없어 더 좋고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이야기]
(1) 아이보리 비누

거버ㆍ맥스웰커피ㆍ바셀린 처럼
궁핍한 시절 풍요롭게 해준 향기
150년 원형 지킨 비누의 대명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또렷한 기억의 원점이 있다. 회고의 감상에 젖어드는 일은 대개 어릴 적의 사건에서 비롯된다. 몇년 전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리마스터링 되어 다시 개봉됐다. 당시 70대였던 왕년의 뮤지션들이 다시 모여 들려준 아프로 쿠반 재즈의 매력은 각별했다. 음악이야 그렇다 치고 더욱 인상적인 내용은 인터뷰였다.
 
쭈그러진 할아버지.할머니가 된 이들의 기억은 젊은 시절의 화려함을 별로 떠 올리지 않았다. 어릴 적 자기 할머니의 시가에 불을 붙여주고 함께 노래 부르던 일들을 더 강조했다. 이후 질곡의 삶으로 이어져 때 묻고 왜곡된 기억들은 애써 지워버리고 싶었을까. 누구에게나 유소년기의 기억은 강렬하다. 모든 것이 처음의 신선함으로 채워졌을 테니까.
 
이 나라에서 1960~70년대를 지낸 세대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억의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집집마다 들러 처음 보는 미제 물건 보따리를 풀던 아줌마들의 인상이다. 미국 물건에 덧씌워져 사람마저 미제로 부르는 멀쩡한 한국 아줌마의 활약은 시대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미제 아줌마'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이들이 어찌 한둘일까. 보따리 속의 물건은 종류도 다양했다. 자잘한 생필품에서 씨레이션, 카세트 레코더, 카메라까지. 일상과 문화를 아우르는 동경의 세상이 아줌마의 보따리에서 펼쳐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배시시 웃는 미국 아기가 찍힌 하늘색 '거버' 이유식, 짭짤한 '스팸' 통조림, '탱'가루로 불리던 주황색 분말주스, 지금은 줘도 안 먹는 '리즈' 크래커, 맥스웰 인스턴트 커피, 손 튼데 바르는 '바셀린' 연고, 면도용 '올드 스파이스' 크림, 흰색의 '아이보리' 비누…. 이들 물건의 상표와 디자인은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하다.
 
물건의 출처란 뻔하다. 미군 부대 PX에서 빼돌린 것일 게다. 정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단속반을 풀면 미제 아줌마들은 보이지 않았다. 생계를 위한 근신의 기간 동안 동네의 일상엔 혼란이 벌어진다. 비누가 떨어지고 얼굴에 바를 크림도 동난다. 입맛을 버려놓은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사라져 버리게 된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는 생각보다 큰 여파를 남겼다. 국산품의 조악한 품질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까닭이다. '메이드 인 유에스 에이'의 신화는 거대한 힘과 신뢰의 상징으로 575세대의 기억을 지배한다.
 
네 남매를 둔 내 어머니의 살림은 안 봐도 다 안다. 어머니 역시 사고 싶은 물건이 얼마나 많았을까. 값비싼 돼지고기 통조림 스팸이나 먹지 않아도 그만인 탱 주스는 우리 몫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씻는 일은 거를 수 없다. 피부에 해롭지 않다는 아이보리 비누라면 꼭 사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게다. 단단한 국산비누에 비해 무르기 짝이 없는 아이보리 비누는 빨리 닳았다. 그래도 아이보리는 떨어진 적 없다. 제 새끼들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모정의 결단일 터다. 궁핍했던 시절 우리 집 수도간에서 풍요의 아이보리 비누 향이 그치지 않은 사연이다.
 
순백색 비누가 풍기던 향은 갓 깨어난 오리 새끼의 각인효과 마냥 몸에 박혔다. 내게'비누의 향'이란 바로 아이보리 비누가 풍기는 냄새였다.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번지듯 다가오는 향은 마냥 좋았다. 싸구려 향료가 든 비누의 자극적 향과 구분되는 품위의 격차를 어린 나이에도 저절로 알게 됐다. 비누 하나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으며 목욕을 했다. 누나의 머릿결에서도 비누 향이 풍겼다. 찰랑거리는 머리가 햇빛에 반짝였고 흩날리는 아이보리 향은 나풀거리며 코끝을 스쳤다.
 
비누 향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힘들다. 곁들여진 기억으로 증폭된 향만이 깊게 간직되어 있을 게다. 아이보리 비누 향은 절대의 기준이 되었다. 더 좋은 향기조차 시큰둥하게 여겼던 무지가 부끄럽지 않다. 좋다는 고급 향은 얼마나 많은가. 코의 감각을 일깨우는 향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을 여럿 만났다. 이들은 가장 고급한 감각의 대상으로 향수를 든다.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는 후각의 쾌감이다. 아쉬움 때문에 간절해지고 연장시키고 싶은 욕구가 향수를 부른다는 말은 일리 있다. 내겐 어릴 적 각인된 아이보리 비누 향의 지속을 바라는 욕구가 끈질기게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집 안 세면대 위에 놓인 세정제의 종류가 어지럽다. 비누뿐 아니다. 클린저, 샴푸, 린스…용도조차 파악되지 않는 마누라의 세안용품은 봐도 모른다. 아이보리 비누만이 온전한 내 차지다. 비누 하나로 씻는 일을 다 해결한다. 아니 그 이상 필요가 없다. 머리털도 없으며 예민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신체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익숙한 비누 향과 부드러운 거품의 감촉만이 필요할 뿐이다.
 
몽골로 여행 갈 때면 반드시 아이보리 비누를 챙긴다. 멀쩡한 나라라면 일부러 비누 따위는 준비하지 않는다. 거친 자연 뿐인 나라에서 비누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물이 나타나면 바로 씻는 일을 해결해야 한다. 아이보리 비누를 물에 담가놓고 사용한다. 물에 뜨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비누들 가운데 물에 뜨는 제품은 거의 없다. 물가에 내려놓아 흙 묻은 비누를 비벼대는 불편함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잃어버릴 염려 없이 깨끗한 비누가 주는 상쾌함을 누리는 즐거움은 각별하다.
 
아이보리 비누가 물에 뜨는 이유를 안다. 비누입자에 풍부한 공기층이 담긴 원료를 굳혀 만든 덕분이다. 연구진의 실수로 비롯된 우연한 발견을 제품화시킨 내력이 재미있다. 기계 스위치를 끄지 않아 넘친 거품을 실험 삼아 굳혀보니 이전에 없던 부드러운 비누가 생겼다는 것. 이렇게 만든 비누는 비중이 작아 물에 떴고 높은 순도와 풍부한 거품을 냈다. 엉뚱한 몽골 초원에서도 아이보리 비누는 실력 발휘를 했다.
 
아이보리 비누는 세계 최대의 생활용품회사 P&G에서 만든다. P&G는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설립되어 오랜 전통을 이어온 관록이 있다. 수많은 브랜드를 거느린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출발이 바로 아이보리 비누다. 1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아이보리 비누는 원형을 잃지 않고 계속 만들어진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무한 신뢰는 당연하다. 마치 기억의 랜드 마크로 여겨지는 편안함과 익숙함이 비누에 담겨 있다.
 
'비누란 곧 아이보리'란 자동연상은 억지가 아니다. 만드는 이의 확신이 넘쳐서이기도 하고 쓰는 이의 인정이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 아이보리에게 보내는 맹목적 신뢰를 나는 거두지 않겠다. 어릴 적 느꼈던 향은 여전하고 익숙한 거품의 번짐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상아를 연상시키는 우윳빛 색깔에서 청순함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자극이 없는 순수한 향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모두의 기억을 아우르는 좋은 인상이 변함없는 품질의 바탕에서 나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아이보리 비누는 도드라지지 않으나 진정 훌륭함을 일컫는 시대의 수퍼노말(supernormal)이다.
 
내가 아이보리 비누를 여전히 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색깔이 없어 질리지 않는다. 둘째 은은한 향이 별로 튀지 않는다. 셋째 거품은 풍부하지만 가격의 거품은 없다. 결국 모두에게 사랑받을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기막히게 알아보는 재주를 지녔다. 방법은 간단하다. 써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물건이라면 진정 좋은 것이다.  
 
 
 
윤광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윤광준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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