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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천천히 써야 써지는 볼펜처럼

어디든 다운타운은 자동차와 사람으로 넘쳐난다. 오랜만에 찾은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도 그랬다. 붐비는 자동차의 행렬, 사람들의 잰 발걸음, 빽빽한 빌딩 숲을 헤집고 건물을 세우는 건축 현장의 활발함이 다운타운을 가득 메웠다.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지인을 방문하고 점심을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다운타운에서는 어디를 가든 주차하기가 어렵다기에 식당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신호등 몇 개만 지나면 금새 갈 수 있다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지만, 다운타운의 번잡한 길을 지나는 데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더구나 그분의 발걸음은 왜 그리도 느린지, 분주함에 익숙한 나는 중간중간 멈춰서서 그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다 보니 이제 나도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지자 놀랍게도 또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빌딩 사이로 푸른 하늘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인사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의 칙칙함 속에서 생명의 기운 가득 품은 가로수는 바람과 햇살을 한껏 머금은 채 춤을 추어댔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젊은이들의 흥겨운 몸짓, 짧은 점심시간을 맞추기 위해 빠르게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저마다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더구나 천천히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에는 한 이민자가 지나왔던 진솔한 삶의 여정이 고즈넉이 녹아 있었다. 그 느긋함은 식당에서도 이어졌다. 우리 일행을 자리에 앉히고는 한참 만에 음료수 주문을 받은 직원은 다시 한참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음식 주문을 받으러 왔다.  
 
예전 같으면 짜증이 앞섰을 텐데 어차피 마음을 비우고 느린 걸음으로 찾아온 식당에서 바쁜 티를 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옆에서 재촉하는 이들의 어수선함이 눈과 귀를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만한 점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전대를 잡으니 끊겼던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멈췄던 세상이 또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속도를 줄였다.  
 
뒤에서 달려드는 자동차가 추월하도록 슬쩍 자리를 내주고, 옆에서 끼어드는 차가 편하게 들어오도록 속도도 살며시 줄여주었다. 자동차의 속도를 조금 줄였을 뿐인데도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세상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저런 건물이 있었구나, 저 광고판은 언제부터 있었지?’ 늘 다니던 길에서 만나는 낯선 풍경을 뇌까리다 보니 어느새 집이다. 가끔은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가야 보이는 세상을 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날의 감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볼펜을 들었다.  
 
늘 쓰던 볼펜인데 아무리 써도 나오지 않았다. ‘속에는 까만색 잉크가 가득한데 왜 써지지 않을까?’ 두덜대면서 볼펜을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여 봤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끌쩍거리는데 어느 한순간 볼펜이 지난 길에 검은색 줄이 뚜렷이 나타났다. 볼펜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을 때였다.  
 
오늘도 조금만 천천히 살아보자. 천천히 써야 써지는 볼펜처럼, 걷기도 천천히, 운전도 천천히, 생각도 천천히 하다 보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이 선명하게 펼쳐질 것이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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