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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법 대신 정치가 말하게 하라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말 많고 탈 많은 대통령 출근길 문답이지만 지난 월요일(25일)은 특히 아쉬웠다. 주말 사이 대우조선해양 파업이 끝나고 첫 출근이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통령은 경찰 집단행동에 대해 "관련 부처에서 잘할 것"이라고 한 뒤 전시된 발달장애인 작가들의 그림에 잠깐 관심을 표했을 뿐이다. 기자들이 묻지 않아도 "파업이 끝나 다행이다. 하청 노동자의 어려움도 앞으로 개선됐으면 한다"고 한마디 했으면 어땠을까.
자기성찰 없는 법과 원칙의 남발
반발 부르는 대통령의 강한 언어
남는 건 닫혀 버린 보수의 이미지

30% 임금 인상을 주장하던 하청 노동자들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4.5% 인상과 약간의 명절 상여금 지급에 합의했다. 불법 점거라는 비난과는 별도로 이들의 열악한 처우와 원청·하청 격차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대통령의 한마디는 '불법 앞에서 법치를 강조하긴 했지만, 대통령의 관심은 실정법 너머까지 열려 있다'는 메시지가 되지 않았을까. 노동시장 이중 구조라는 노동개혁의 핵심 문제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신호도 됐을 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6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내부총질' 문자 파동이 불거진 다음 날인 27일부터 외부 일정을 이유로 출근길 문답을 생략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미국인에겐 보수는 '엄한 아버지', 진보는 '자애로운 부모님'이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했다. 엄한 아버지는 자식에게 규율과 책임을 강조한다. 반면에 자애로운 부모는 자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감정이입을 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들 이미지를 구현하는 정치로 각자 지지를 구한다.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어떤 걸까. 윤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는 법과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의 '구부러진 법치'에 대한 공격은 정권 교체의 원동력이 됐다. 법치 중시 대통령답게 불법 파업 노동자들에겐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압박했고, 경찰의 집단행동에는 "중대한 국기 문란"이라고 질타했다. '엄한 아버지'라는 보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듯하다.

그러나 놓친 게 있다. '엄한 아버지'는 규율만 내세우지 않는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엄한 아버지상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 약자에 대한 배려, 가장으로서의 자기희생 같은 가치가 동반된다. 사실 그래야 규율도 작동한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꼰대스럽다"며 투덜대면서도 따르는 것은 아버지가 체현하는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권의 이미지는 어떤가. 엄한 규율과 짝을 이뤄야 할 자기희생이나 책임감 같은 게 보이는가. 공정·법치·상식 같은 거룩한 말을 되뇌어 놓고는 지인 채용에 대해선 "뭐가 문제냐"는 투 아닌가. 사실상 상대 실책으로 간신히 정권을 잡아놓고는 마치 자신들의 공인 양 전리품을 다투는 꼴불견은 또 어떤가. '내부 총질 금지' 구호 속에서 청년 정치의 자리는 닫히고, 그 자리엔 퇴행적 보수의 기운이 꿈틀댄다. 엄하지만 자기를 희생하는 아버지도, 친구처럼 살갑게 다가서는 신세대 아빠의 모습도 찾기 힘들다.

법률가 티를 벗지 못한 대통령의 언어는 이미지 혼란을 더한다. '불법 엄단' '단호' '국기 문란' 같은 성마르고 강한 단어는 반감을 부른다. "법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형식주의 법 논리도 문제다.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에 대해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도 시위가 허가되는 판"이라고 한 것은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라 법률가의 언어였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민주주의의 흔들릴 수 없는 토대지만, 그런 법의 성근 그물을 메우는 것이 정치다. 법의 영역에서 정치가 작동하면 부패가 따르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법을 앞세우면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정권이 추구하는 이미지와 대중이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다르다. 지지율 회복을 위해서는 이를 냉철하고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필요한 악역은 가급적 윤핵장(윤석열 핵심 장관)들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화합의 언어를 고민했으면 한다. 법의 언어 속에 묻혀 버린 '약자와의 동행' 정책 기조부터 구출해 내야 한다. 대통령 혼자 할 일은 아니다. 제 역할을 못하는 참모와 당 조직부터 정비해야 한다. 출범 석 달도 안 됐다고? 싹수를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현상(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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