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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프리즘] 8월 18일은 ‘리멤버 위트컴’

위성욱 부산총국장
오는 8월 18일은 부산이 한국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된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수도를 대전(6월 27일), 대구(7월 16일)를 거쳐 부산으로 옮겼다. 당시 부산역은 열차 편으로 도착한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28만여 명이던 부산 인구는 전쟁 막바지 10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는 급격히 늘었지만, 집 지을 곳은 마땅찮았다. 피란민들은 가마니·판자 등으로 산비탈과 공동묘지까지 움집과 판잣집을 지었다. 그렇게 생긴 피란민촌이 남구 우암동과 서구 아미동, 중구 영주동 등이다.

그런데 1953년 11월 27일 영주동 판자촌에서 큰불이 났다. 이 불은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주택 3132채가 소실됐고 이재민만 3만 명이 발생했다. 사상자도 29명이나 됐다. 하지만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 정부도 이들을 돕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가 있었다.

12일 위트컴 장군 40주년 추모식. 송봉근 기자
당시 미2군수사령관으로 부산에 온 리처드 위트컴(Witcomb·1894~1982) 준장이었다. 현장을 둘러본 그는 군수물자 무단 전용이라는 군법을 어기면서까지 이재민에게 군수 물자를 나눠줬다. 이 때문에 미 청문회에 소환됐다. 하지만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고 항변했다. 워싱턴 의사당의 많은 의원은 책망 대신 기립박수로 그의 선택을 지지했다. 그는 더 많은 구호금을 받아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피란민들에게 부족한 의료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 장병 월급을 1%씩 모으는 기금 모금 운동도 했다. 직접 갓을 쓰고 도포 차림으로 거리로 나가 모금 운동을 해 미국 잡지 ‘라이프’에 소개되기도 했다. 덕분에 메리놀병원 등이 세워졌다.

윤인구 초대 부산대 총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겠다’며 캠퍼스 건립에 나섰을 때 다들 실현 가능성을 낮게 봤다. 하지만 위트컴은 “내가 당신 꿈을 사겠다”고 나섰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장전동 50여만 평 부지를 제공받아 여기에 건축자재와 공병부대를 지원해 현재 부산대 설립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외에도 주거지 및 도로 건설, 보육원 건설 등 전후 부산 재건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82년 7월 11일, 장군은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이 공원엔 전쟁 희생자 총 2315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위트컴은 여기에 묻힌 유일한 장군이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세계 각지에서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이 안장된 부산을 향해 일제히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행사가 열린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리멤버 위트컴’을 할 차례다.



위성욱(we.su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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