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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복잡하고 몰라서 못 지키는 외환법...200쪽 위반사례집 나올 정도


서경호 논설위원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이 말을 공개석상에서 인용한 사람은 김성욱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이다. 지난 5일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서 열린 ‘신(新)외환법 제정방향 세미나’에서다. 기존 법을 부분적으로 고칠 게 아니라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한 말이다. 그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해온 게 다름 아닌 외국환거래법의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라는 점에서 대단한 자기반성이 아닐 수 없다. 김 국장은 “외환제도를 개편할 때마다 기존 규제의 당위성이 부각되면서 관성적으로 규제가 존치되곤 했다”며 “모든 규제의 필요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5일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서 열린 ‘신(新)외환법 제정방향 세미나’에서 김성욱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공연 가수, 달러 취득 허가받기도
현재 외국환거래법의 전신은 1961년 제정된 외국환관리법이다. 6·25 이후 경제개발기에는 외환이 부족했다.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웬만한 건 ‘금지’가 원칙이었다. 부족한 달러를 정부와 금융기관에 모으는 외환집중제를 실시했고, 외화낭비를 막기 위해 우선순위에 따라 실수요가 있는 경우에만 외환 취득을 허용했다. 심지어 해외공연을 위해 출국하는 가수들도 필요한 달러를 사기 위해선 당시 재무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1980년대까지 재무부 청사에 출국을 앞둔 유명 연예인이 등장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도 외환 규제의 산물이었다.

경제 성장에 발맞춰 1990년대부터 외환거래 자유화 논의가 시작됐고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지금의 외국환거래법이 제정됐다. 법률 이름이 ‘관리’에서 ‘거래’로 바뀐 만큼, 법률의 목적도 ‘대외거래의 조정·관리’에서 ‘대외거래의 자유 보장’으로 달라졌다. 외국환거래법은 원칙적 자유, 예외적 규제라는 네거티브 시스템을 표방했지만 실제는 좀 달랐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외자의 유입과 유출을 함께 촉진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암묵적으로 외자유출 억제를 위해 거래시 사전신고나 지급시 절차적 규제 등 조정과 관리방식으로 운영됐다”고 분석했다.

물론 외국환거래법 제정 이후 부분적인 자유화 조치는 있었다. 법 제정 직후 개인의 외환거래가 자유화됐고, 2002년 7월 개인의 증여성 송금 자유화 등 1단계 외환자유화 조치가, 2006년 1월 자본거래 허가제가 신고제로 바뀌는 등 2단계 자유화 조치가 시행됐다.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지만 ‘자유’를 체감하긴 힘들었다. “단순 신고가 아닌 신고수리제 성격”(이승호 선임연구위원)이었기 때문이다. 당국이 신고를 받지 않으면 신고를 할 수 없었다. 이런 ‘무늬만 신고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대외건전성 관리와 외환모니터링 목적을 위해 지금까지 유지돼 왔다.
지난 5일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서 열린 ‘신(新)외환법 제정방향 세미나’에서 김성욱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 한국수출입은행]

복잡한 법, 예외에 ‘예외의 예외’까지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두 차례 위기의 영향과 지속적인 대외 불확실성 등으로 법의 실제 운영엔 외자 유출 억제의 철학이 항상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세미나 발언 중에 기재부 담당인 김 국장의 ‘자아비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외환거래, 참 어렵다. 조금씩 고치다 보니 법조문이 너무 복잡해졌다. 예외가 있고, ‘예외의 예외’가 있을 정도다.”

그가 세미나에서 거론한 사례다. 해외 취업에 성공한 A씨는 월세 보증금 등 해외 정착비용으로 출국 전 해외송금 7만 달러를 요청했다. 은행은 5만 달러 이상이고 사용목적을 확인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A씨는 신고 예외가 적용되는 1만 달러만 갖고 일단 출국했다. 6만 달러 송금이라는 고난의 업무는 A씨 어머니 몫이었다, 한국은행에 신고하는 데 최소 11개 이상의 서류를 제출해야 했고 1~2개월 이상이 걸렸다.

해외투자 기업을 너무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해외 직접투자를 하고 나면 보고해야 할 게 많다. 증액투자 등 내용이 변경될 때마다 사전신고를 해야 한다. 몰라서 법을 어기고 과태료 처분을 받거나 심지어 위반금액이 10억원을 넘으면 검찰에 통보돼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매년 사후보고해야 하는 항목에는 재무제표뿐만 아니라 매입처별 매출비중, 정부 건의사항 등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들어있다. 해외투자를 무슨 잠재적인 재산 해외도피쯤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과잉 규제를 촘촘하게 던져놓을 수 없다.

우리은행에 지난해 외환 관련 문의 8만 건
김응철 우리은행 부행장은 “지난해 우리은행에 들어온 고객의 외환거래 관련 문의는 총 8만 건이며 그중에 외환규정 관련이 5만417건(66%)에 달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금융감독원이 2019년 무려 200쪽짜리 외국환거래법 위반 사례집을 발간할 정도로, 복잡해서 못 지키고 몰라서 못 지키는 법률인 셈이다.

경제와 금융환경의 변화도 신외환법 제정을 서둘러야 할 이유로 꼽힌다. 한국은 2000년대 이후 큰 폭의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면서 2015년 이후 민간 부문이 순대외채권국으로 바뀌었다. 고령화와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해외 금융자산에 대한 수요는 커지고 있다. 고령화로 미래 소비를 위한 저축이 늘어나는데 인구 감소로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면서 국내 투자수익률도 하락한다. 대안은 해외 투자다. 해외 투자로 수익률을 높여 우리 국민의 가처분소득을 늘려야 한다. 경상수지 흑자보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이자나 배당 같은 금융소득인 본원소득수지 흑자가 더 많은 일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98년 신외환법을 도입해 외환거래를 완전 자유화했다. 이미 우리나라 거주자의 해외증권 투자는 2001년 79조원에서 지난해 8347조원으로 1000배 이상 증가했다. 거주자, 비거주자는 외환거래 법규에 나오는 개념이다. 거주자는 대한민국에 주소 또는 거소를 둔 개인과 대한민국에 주된 사무소를 둔 법인이다. 거주자 외의 개인과 법인은 비거주자다.

패시브 펀드가 좋아하는 외환제도 개혁을
글로벌 투자 환경이 개별 종목이 아니라 특정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펀드로 이동하는 추세도 고려해야 한다. 액티브 펀드의 비중이 2011년 20%에서 지난해 14%로 줄어든 반면, 패시브 펀드 비중은 같은 기간 8%에서 16%로 늘었다.

강동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브릭스(BRICs)의 성장으로 MSCI 신흥국지수 내에서 한국 비중은 앞으로 하락할 전망”이라며 “선진국 지수 편입이 지연되면 한국에 대한 투자규모도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패시브 자금 유치가 중요하다. 강 선임연구위원은 “패시브 자금은 개별투자보다 거시경제와 금융환경에 투자한다”며 “외환, 외화자금, 자본시장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세미나에서 기재부가 밝힌 신외환법 제정방향은 이렇다. 첫째, 자본거래와 지급·수령 단계의 사전신고제가 폐지된다. 지금은 사전신고가 원칙이고 신고예외만 열거하고 있는데, 경제적 영향이 커서 당국이 사전에 알아야 할 일부 거래만 열거하는 방식으로 조정된다. 외환모니터링에 필요한 거래를 선별하기 위해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등 관계기관과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둘째, 업권을 나누지 않고 동일 업무에는 동일 규제를 도입한다. 은행에 비해 그간 ‘대접’을 못 받은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회사의 불만을 감안했다.

셋째, 법령의 구조를 국민이 이해하기 쉽게 고친다.

지난 5일 한국수출입은행 대강당에서 열린 ‘신(新)외환법 제정방향 세미나’에서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수출입은행]
과잉규제 해소, 새 환경 부응은 긍정적
신외환법은 과잉 규제를 해소하고 경제와 금융의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이 많다. 특히 복잡하고 모호한 법규에 대한 권위적이고 독점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경제적 지대를 누릴 수 있는 관료 조직이 스스로 메스를 들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국민의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선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 꽤 있다.

우선 신외환법으로 규제를 풀어 대외금융거래를 장려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의 문제다. 대외자산 투자가 늘면 국내 성장과 고용에는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하지만 투자수익률이 낮은 데도 정치적인 압박이나 국내 여론에 밀려 무작정 국내 투자를 이어가는 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강동수 KDI 선임연구위원은 “비효율적 투자로 일자리를 확충하는 건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데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며 “대외자산의 증가로 소득이 다양화하면 경제의 변동성 축소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외환보유액만으로는 환율 변동의 속도조절에 한계가 있다”며 “민간의 대외금융자산이 많아지면 그 자체로 자동안정장치 역할을 해서 시장의 쏠림 현상을 줄여줄 수 있다”고 했다. 대외건전성 측면에서도 좋다는 의미다.

달러당 1300원대까지 오른 요즘 외환시장이 규제 완화를 논할 분위기냐는 문제 제기도 나올 수 있다. 2008년에도 신외환법 제정 움직임이 있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로 무산된 적이 있다. 강삼모 동국대 교수는 “국내 외환시장 개장시장 연장 등으로 원화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개장시장 연장 등 외환시장 선진화 방안은 신외환법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에 들어있다. 기재부는 외환모니터링 등 대외건전성 조치는 더 튼튼하게 유지하며, 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충분히 시간을 갖고 신외환법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연말까지 의견을 수렴하고 구체적인 정부 법안은 내년 이후 내놓겠다는 것이다.

한·미 통화스와프 이슈 객관적으로 봐야
어찌 보면 현재 시장을 보는 정부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달러 환율이 올랐지만 달러 강세의 영향이 크고 다른 통화에 비해 원화가치 하락이 과도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금융위기 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08년과 달리, 시장에서 외화유동성 부족(달러 가뭄)도 없다”고 말했다.

한·미 통화스와프 복원이나 상시 통화스와프 체결 이슈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위기도 아닌데 한국은 왜 통화스와프 요구를 하느냐고 미국 측이 오히려 의아해한다는 반응이 흘러나온다. 신관호 고려대 교수는 “상시 통화스와프는 미국에 애걸할 문제가 아니라 원화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원화 금융상품이 많아져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 1월 기준 원화 결제비중은 0.1%로,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39.9%), 유로(36.6%), 영국 파운드(6.3%), 중국 위안(3.2%), 일본 엔(2.8%) 등에 한참 못 미친다.

김성욱 국장이 발표 말미에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유명한 라틴어 어록인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를 인용했다. ‘천천히 서둘러라’는 뜻이다. “외국환거래법령 개편이 정말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절대 서두르지는 않겠다. 많은 의견을 듣고 앞으로 20~30년은 갈 수 있는 법제를 만들겠다.”




서경호(prax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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