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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기계도 일류기술도 녹슬었다…원전 강소기업 '악몽의 5년'

 지난 9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 소재 금속 절삭기계 제조업체 영진테크윈 공장 내부. 원자력발전소에 납품할 부품을 가공하는 기계에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어 있다. 이 공장 가공 설비 19개 중 16개는 녹이 슬거나 일감이 없는 상태로 공회전 중이다. 송봉근 기자

지난 9일 오전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금속 절삭기계 제조업체 영진테크윈. 1160㎡(약 350평)의 공장 내부엔 대형 선반 머신이 공회전만 하고 있었다. 강성현(59) 영진테크윈 대표는 “이 기계는 2년째 공회전 중”이라며 “언제 일감이 들어올지 모르지만 공회전이라도 해두지 않으면 녹슬어 작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 회사가 보유한 19대의 기계설비 중 16개는 이렇게 ‘개점휴업’ 상태다. 프로젝트 이름과 제품명, 작업자를 적어두는 화이트보드는 텅 비어 있다.

한때는 원전업계 강소기업
공장 한복판엔 원자력발전소(원전)의 주 기계 구동장치에 들어가는 4.5m 길이의 대형 봉(드라이브 샤프트) 97개가 나무상자에 쌓여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2020년 말 경상북도 울주군 신고리 6호기에 납품됐어야 했다. 하지만 공기가 지연되면서 먼지만 뒤집어쓰는 신세가 됐다.

발걸음을 옮겨 공장 문을 열었더니 역시나 먼지가 풀풀 날렸다. 신한울 1·2호기 원자로 냉각펌프에 들어가는 부품(로워펌프 샤프트)을 가공하는 대형 연삭기가 방치돼 있었다. 이 회사 박선욱 총괄팀장은 “0.001㎜ 단위까지 정밀 가공이 가능한 기계인데 2019년 이후 한 번도 돌린 적이 없다”며 “2억원짜리 고가의 기계가 고철이 돼가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1995년부터 원전 부품 제조 및 가공 산업에 종사하다 2003년 회사를 설립한 강성현 영진테크윈 대표. 송봉근 기자

이 회사는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이었다. 원전에서 전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자로 주 기계 부품인 핵 연료 제어봉 구동장치와 원자로 냉각펌프 등을 가공하는 기술이 빼어났다.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1995년 원전용 구동장치 국산화를 추진하던 때에도 참여했을 만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강 대표는 원자력 연료봉 구동장치 부품(래치·latch)을 처음 만드는 데도 참여했다.

지금은 기계 팔아 월급 주는 신세
강 대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은 2015년 이후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제7차 전력수급계획을 통해 원전 확대 계획을 밝혔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참여를 결심하고, 은행에서 16억원을 대출받아 설비를 확충했다.

강 대표는 “당시만 해도 15명의 직원이 연 2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설비를 늘리려 대출 받은 16억원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듬해부터는 신규 원전용 부품 생산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지속된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원전산업이 멈춰섰다. 지난 9일 경남 창원시 의창구 ㈜영진테크윈 내부에 원자력발전소에 납품할 완제품이 쌓여 있다. 송봉근 기자


그런데 2017년 정권이 바뀌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문재인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을 백지화하고, 노후 원전 가동을 연장하지 않기로 해서다. 매출은 5년 새 22억원에서 8억원으로 고꾸라졌다.

은행에 3억원 대출을 신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사비를 털고, 지인에게 4억원을 빌려 공장을 돌렸다. 급기야 밥줄인 기계까지 내놓았다. 1억9000만원을 들여 제작한 선반머신을 절반 값(8000만원)에 팔아 직원 월급을 줬다.

강 대표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2015년 15명이던 기술자를 8명으로 줄였어요. 회사부터 살리고 봐야 했습니다.”

요즘 이 회사는 원전과 무관한 선반·밀링 사업으로 먹고산다. 지금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상용 발전기를 가공한다. 강 대표는 “더 안타까운 것은 래치를 국산화하던 일류 가공기술이 녹슬어 간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내 원전 산업의 메카로 불렸던 창원에는 영진테크윈 같은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실이 원전 부품 업계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경남 소재 270여 개 원전 협력업체의 매출은 2016년 16조1000억원에서 2018년 10조4000억원으로 37.9% 감소했다. 고용 인원은 같은 기간 2만3000여 명에서 1만97000여 명으로 14.3% 줄었다.

바뀔 거라 했는데 현실은 ‘여전히’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지난 4월 창원국가산업단지를 찾아 “창원을 한국 원전 산업의 메카로 우뚝 세우겠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이 말을 듣고 “당시엔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조기에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고 말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공사 재개 시점을 2025년으로 제시했다. 국가 에너지 계획을 변경하고, 이를 토대로 건설 허가, 환경영향평가 등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해서다.

원전 업계는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실제로 신한울 3·4호기는 2016년 환경영향평가를 마쳤지만 시효기간(5년)이 지난 상태다. 이를 처음부터 다시 밟으려면 2년 안팎이 걸린다. 업계는 이러면 최소 3년가량 ‘일감 절벽’에 부닥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강 대표는 “환경영향평가 이전에도 가능한 주 기계 관련 부품 발주부터 해준다면 이를 근거로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다”며 “생존 위기에 몰린 부품사를 위한 최소한의 지원”이라고 말했다.

“1995년 케도처럼 혁신적으로”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제주도 전력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 남제주LNG화력발전소는 정부의 전력수급계획 수립 이전인 2019년 3월 착공한 전례가 있다”며 “이 같은 전례를 참고해 정부가 제도적 절차를 준수하면서도 행정적 배려를 통해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지난 5년간 원자력 산업의 뿌리 역할을 담당했던 다수의 중견·중소업체가 수주가 끊긴 이후 업종을 전환하거나 폐업 위기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이어 “기존 제도·규제를 넘어설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는 범정부 차원의 원전 생태계 조성 기구를 설립해 한국형 원전 수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1995년 대북 경수로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희철(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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