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중앙시평] 청와대 개방과 삼청장 복원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윤석열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를 시민의 품속에 안겨줌으로써 서울에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구중궁궐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일반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 이제 시민 누구나가 즐겨 찾는 코스의 하나로 된 것인데, 단순히 개방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앞선다. 현재 청와대 경내에 있는, 임시정부 부주석인 우사 김규식 박사의 거처였던 삼청장을 원래대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우사는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와 더불어 해방정국의 세 영수 중 한 분으로 평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해왔기에 민족의 사표로 널리 추앙받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독립운동 끝에 귀국한 이들 세 영수가 거주했던 곳은 이화장(우남), 경교장(백범), 삼청장(우사)으로 당시 이곳에서 대부분의 정치현안이 입안·논의되고, 실천에 옮겨졌기에 역사적인 장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청장, 우사 김규식 박사의 거처
해방 정국 논의한 역사적 장소
독립 헌신한 그의 정신 기리려면
청와대 경내 삼청장 복원해야

이런 의미에서 이화장과 경교장은 오래전 복원되고 개방되어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나, 삼청장만은 복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놓여있다. 청와대 안가로 사용되어 일반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기 때문인데, 마침 청와대가 개방됨에 따라 이제 이화장이나 경교장처럼 삼청장도 예전 상태로 복원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사는 1919년에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자격으로 파견되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호소했고, 강화회의가 끝난 후에는 미국으로 가 우남과 함께 미국 조야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으며,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는 일과 독립공채를 발행하여 상해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일을 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혁명운동’이라는 제목으로 한민족의 독립투쟁 현황에 관한 보고를 했다. 보고에서 그는 3·1운동을 비롯하여 한민족은 일치단결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일제의 잔학한 탄압으로 한민족이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음을 폭로했다.

1933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보내는 민간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미국 각지의 한인 동포와 중국 교민을 대상으로 두 나라 민족이 힘을 합쳐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연설을 해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조직된 ‘중한민중대동맹’은 미국의 정·관계를 상대로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일을 했다.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각지를 다니며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립하기도 했던 우사는 국립사천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와 저술활동에 열중하다가,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국무위원과 부주석으로 활동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1월 23일 32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우사는 삼청장에 거주하며 혼란한 시국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인들이 좌우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과 갈등을 반복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해 중도진영 인사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출범시켜 사회통합과 정국안정을 모색한 것이다. 또한 우사는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이 되어 신생국가가 필요로 하는 각종 법률의 제정에 나섰는데,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후일 제헌의회는 원활하게 입법활동을 할 수 있었다.

미·소의 대립으로 분단이 우려되는 상황이 초래되자, 우사는 남북의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분단 극복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를 유엔위원단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 백범도 적극 찬성하고 동조함으로써 우사와 백범은 연명으로 남북지도자회의를 개최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개최되게 되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남북의 지도자들이 처음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단초는 우사가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사는 누구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열렬히 투신했고, 귀국 후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에 사회통합과 정국안정,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북한 땅 만포진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극도로 암울했던 시기에 전 세계를 향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한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던 우사가 귀국 후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던 곳이 바로 삼청장이다. 현대사에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에 삼청장은 우리에게 역사적이고 교육적인 가치가 매우 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평면적인 개방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복원하여 우사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